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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노이슈반슈타인 성에는 ‘백조의 기사’ 살고 있을까?

[유럽 인문학 기행-독일] 노이슈반슈타인 성

 

들판의 푸른 풀들이 모두 노랗게 시든 1868년의 늦은 가을이었다. 독일 뮌헨 남서쪽에 있는 호헨슈방가우 성으로 마차 행렬이 이어졌다. 국왕 루트비히 2세의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고 바바리아 왕국의 대신들이 달려온 것이었다.

 

“다들 먼 길을 오느라 수고 많았소. 짐이 여러분에게 알려야 할 일이 있어 모신 것이니 이해하기를 바라오.”

 

루트비히 2세는 거실 정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천천히 말을 꺼냈다. 대신들은 자리에 앉지 않고 양쪽 벽 쪽으로 나눠 선 채 왕의 이야기를 들었다.

 

“새로운 성을 하나 더 짓도록 하겠소. 아버지가 건설한 호헨슈방가우 성보다 더 화려하고 낭만적인 성을 만들 작정이오. 저기 멀리 보이는 낡은 중세시대 성채가 새 성을 지을 곳이오. 아! 돈 걱정은 하지 마시오. 건축비는 모두 짐이 사재를 털어 낼 테니. 건의하거나 조언할 말씀이 있으면 해보시오.”

 

대신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어떤 말을 한들 들을 국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들은 모두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미친 국왕의 광기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 바바리아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외로운 어린 왕자

 

루트비히 2세의 이름은 루드비히 오토 프리드리히 빌헬름이었다. 그는 바바리아 왕국의 지배자였던 막시밀리안 2세의 장남이었다. 어머니는 프러시아의 왕자 빌헬름의 막내딸인 마리였다. 동생이라고는 오토 하나뿐이었다.

 

부모는 두 아들의 제왕 교육을 가정교사에게 맡겼다. 어린 두 아들과 보내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루트비히는 주로 호헨슈방가우 성에서 혼자 살았다. 그야말로 작은 성에서 외롭게 사는 ‘어린 왕자’였다. 유모가 들려주는 중세 시대 전설과 동화 이야기에 푹 빠진 채 유년과 소년 시절을 보냈다.

 

루트비히는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에게서도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어머니를 ‘선왕의 부인’이라고 불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호헨슈방가우는 막시밀리안 2세가 만든 성이었다. 여행을 다니거나 고성을 둘러보기를 좋아했던 그는 퓌센 인근에서 12세기에 만든 슈반슈타인 성을 우연히 발견했다. 성에 올라가 내려다본 경치에 반한 그는 인근에 새로운 성을 건설했다. 그것이 바로 호헨슈방가우였다.

 

막시밀리안은 가족을 매년 여름 그곳에 데려갔다. 하지만 왕은 사냥에 전념했고, 왕후는 매일 혼자 하이킹을 즐겼다. 두 아들은 부모가 머무는 건물이 아니라 부속건물에서 따로 자게 했다.

 

호헨슈방가우는 ‘백조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인근에 있는 슈반시라는 호수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조는 루트비히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그는 혼자 호수에 가서 백조에게 먹이를 주거나 ‘백조의 기사’를 꿈꾸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루트비히에게 백조는 단순히 순결뿐만 아니라 ‘백조의 기사’의 정신을 상징하는 새였다. 백조의 기사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백조의 기사라고 생각했다. 기사의 비극과 몰락은 그의 영원한 외로움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늘 백조의 기사처럼 옷을 입고 다녔다. 일부에서는 그를 ‘백조의 왕자’, 또는 ‘백조의 왕’으로 부르기도 했다.

 

 

■뜻하지 않은 즉위

 

루트비히가 18세 때 막시밀리안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뜻하지 않게 원하지 않았던 국왕 자리에 올라야 했다.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왕이 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다.

 

루트비히의 정신을 더욱 망가뜨린 사건이 벌어졌다. 2년 뒤 벌어진 전쟁에서 프러시아에 참패를 당한 것이다. 이후 바바리아는 독립국가 지위를 잃고 사실상 프러시아의 종속국가로 전락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바리아 국민은 루트비히를 동정했다. 전쟁에서 패한 건 그의 책임이 아니라 나라에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국왕이 이제 겨우 스무 살밖에 안 된 애송이라는 점도 국민의 동정심을 자극했다.

 

루트비히는 또 매우 잘 생긴데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우 관대하고 자비로운 국왕이었다. 독일에서는 아직도 루트비히가 말을 타고 전국을 다니면서 가난한 농부에게 많은 돈을 선물했다는 전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루트비히는 동성애자였다. 그의 일기장 곳곳에는 동성애의 감정을 억누르려는 내적 갈등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당시에는 동성애가 비도덕적, 비종교적인 죄로 받아들여졌다.

 

전쟁 참패와 성적 특성은 루트비히를 더욱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그는 내면으로만 파고들면서 환상에 빠져들었다. 다재다능하고 절대 권력을 지니고 있어 어느 누구도 맞설 수 없는 중세 시대 지도자가 되겠다는 망상에 늘 사로잡혔다. 특히 전설적인 두 인물에 집착했다. 시인 탄호이저, 그리고 성서에 나오는 성배를 찾아다니는 중세 시대 전설적 기사 파르시발이 그들이었다.

 

 

 

■바그너에게 ‘백조의 성’을

 

루트비히는 어릴 때부터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에 집착했다. 음악에 매혹됐다기보다는 그가 주제로 삼은 중세 시대의 전설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왕 자리에 앉자마자 바그너를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루트비히는 바그너를 위한 거대한 음악 축제를 수시로 열었다. 뮌헨에 바그너의 작품만 공연하는 콘서트홀을 짓기도 했다. 루트비히가 없었다면 바그너가 오늘날 누리는 음악적 명성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하는 음악 평론가는 한둘이 아니다.

 

루트비히는 바그너에게서 큰 힘을 얻었다. 바그너는 그에게 뮤즈였다. 그를 창의적으로 자극했고, 여러 아름다운 성을 짓거나 극장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시간이 갈수록 루트비히는 바그너에게 더 집착하게 됐다. 바그너의 오페라에 묘사된 환상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됐다. 오페라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옷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고, 낮에는 자고 밤에는 마치 모험을 즐기듯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어느 날 루트비히의 머리에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바그너의 오페라를 위한 성을 하나 만들자. 그곳에서는 하루 종일 1년 내내 그의 오페라만 연주하게 하는 거야.’

 

호헨슈방가우 맞은편에 그와 바그너를 위한 성을 짓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중세 시대 전설을 담은 호헨슈방가우를 지었듯이 그는 백조의 기사 전설을 담은 바그너의 오페라를 공연할 수 있는 성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바그너의 신전’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루트비히는 세상의 복잡한 일에서 벗어나 새 성에서 바그너의 환상적 오페라에 빠져 동화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호헨슈방가우로 대신들을 부른 것은 바로 이때였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883년 바그너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신전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루트비히는 가슴이 찢어지는 충격을 받았다. 성에 대한 그의 집착은 더욱 강해졌다.

 

루트비히는 호헨슈방가우의 침실에 황금색 천체망원경을 설치했다. 이곳에서 계곡 너머에 사는 사람들을 살펴보고, 새 성이 건설되는 모습도 감시했다. 이 망원경은 지금도 호헨슈방가우에 남아 있다.

 

 

 

■왕 자리에서 쫓겨나다

 

루트비히는 국왕으로서의 업무를 소홀히 하게 됐다. 호헨슈방가우에 머물면서 모든 정력을 새 성을 짓는 데에만 쏟아 부었으니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국정보다는 외국 정부를 찾아가 돈을 빌리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쏟았다.

 

바바리아의 대신들은 국왕을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법적으로는 그를 국왕 자리에서 퇴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그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질병에 걸렸을 경우뿐이었다.

 

“국왕을 미친 사람으로 몰아갑시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쫓아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어요.”

 

귀족들은 루트비히에게 의사를 만나 진찰을 받으라고 압박했다. 그는 여러 차례 거부했지만 거듭되는 신하들의 요구를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마침내 1886년 구덴이라는 의사에게 정신 상담을 받았다.

 

의사는 ‘망상’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대신들은 왕을 강제 퇴위시키고 호헨슈방가우에서 끌어내 구금시켰다. 그로부터 사흘 뒤 루트비히는 스타른베르크 호수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곁에는 의사 구덴의 시체도 떠다녔다. 정부 발표는 간단했다.

 

“루트비히는 정신이상자라는 진단을 내린 구덴을 죽이고 자살했다.”

 


 

■미완성의 성

 

새 성을 짓는 공사는 1869년 시작됐다. 원래는 3년 내에 공사를 마무리하기로 했지만 일은 계속 늦어졌다.

 

루트비히는 성이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었을 때에는 당초 만들기로 예정했던 방 200여 개 중에서 겨우 14개만 완성된 상태였다.

 

2021년인 아직까지도 성은 미완성 상태다. 성 2층은 외부 관광객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미완성이라서 단순히 벽돌 등 건축 자재만 쌓여 있기 때문이다. 원래 성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망루를 세울 예정이었다. 시간과 비용 문제 때문에 망루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성안의 정원에서 그 기초만 볼 수 있다.

 

루트비히가 성에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투입하는 바람에 바바리아 왕국이 파산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대신들은 왕의 과도한 사치를 지원하지 않았다. 그는 순전히 개인 재산으로 성을 지었다. 이 때문에 개인적으로 엄청난 채무를 지게 된 것이었다. 그의 빚은 한 때 1500만 마르크,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700억 원 정도였다고 한다.

 

루트비히는 원래 새 성을 노이에 부르크 호헨슈방가우 즉 새 호헨슈방가우 성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1886년 루드비히 사망 직후 바바리아 정부는 왕의 개인 빚을 갚기 위해 성을 관광용으로 개방하면서 이름을 슐로스 노이슈반슈타인 즉 ‘새 백조의 바위 성’으로 바꾸어버렸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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