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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라떼는 말이야]딸들의 대학 진학 엄두 못 내던 시절 부러움 한몸에

1960~1970년대 춘천 성심여대

 

1964년 춘천에 개교…지도층 인사 자녀 입학 '귀족학교' 이미지
일반 대학 등록금의 두 배 달해…전국에서 이름난 교수진 모셔와
학교 행사 하나하나가 큰 주목…'낭만의 도시' 이미지 밀알 심어


춘천은 낭만의 도시라고 불린다. 도시 브랜드가 된 '낭만'의 시작은 성심여대와 관련이 깊다. 가톨릭 성심수도회가 만든 재단법인 성심학원은 1964년 춘천시 옥천동에 성심여대를 개교했다. 1960년대는 딸을 대학 공부 시킨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이다. 성심여대는 귀족(?) 학교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장관, 외교관 등 사회 지도층 자녀들이 입학해 눈길을 끌었다. 일반 대학의 등록금보다 곱절 많이 들어가는 학교로 교내 양변기와 강의실에 쳐진 커튼은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모든 연구실과 강의실에 설치된 냉온방기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신문물이었다. 수학여행은 일본으로 가는 등 일반인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1971년 육영수 여사도 이 학교를 방문해 특강을 하는 등 학교 행사 하나하나가 주목을 받았다.서울, 경기, 부산, 대구, 대전 등지에서 학생들이 찾아오는 등 인기가 높았다.

국어국문학과, 외국어 외국문학과(나중에 영어영문학과, 불어불문학과로 분리), 가정학과, 사회사업학과, 화학과, 음악과 6개 학과에 입학 정원은 140명이었으나 절대평가를 실시해 90명 정도를 선발했다. 학생들도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정원을 채워 뽑지 않고 미달로 남겨 둘 정도였다.

교수진은 전국에서 이름난 분들을 모셔 와 학교의 명성을 이어 갔다. 학과 대표는 수업이 시작되기 전 연구실로 가서 선생님의 가방을 들어주며 교실로 안내했다. 사용하는 분필도 정성스럽게 손으로 잡는 부분을 종이로 감싸 놓고 수업을 기다렸다. 가르칠 맛이 나던 시절이었다.

학교의 상징인 자주색 스웨터를 입은 20대 젊고 아리따운 학생들이 명동 시내를 활보하면 시민들의 시선이 공연장의 스폿 조명처럼 쏟아졌다.

성심여대는 한 해 여러 행사를 가졌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강원일보에 기사가 게재되며 관심을 모았다. 기숙사 오픈 하우스, 크리스마스 파티, 체육대회, 올해의 여왕 선발대회 등이 이어졌다. 금남의 공간인 학교가 외부인에게 공식적으로 개방하는 기회는 오픈하우스 행사가 유일했다. 학부모, 친지, 남자친구 등은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남자친구가 없는 학생들은 5월까지 미팅을 통해 남친을 급하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춘천에는 춘천 간호전문대, 춘천교대, 춘천농대, 춘천대학(야간) 등이 함께 있었지만 미팅 대상의 학교는 선배들과 학교의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급(?)이 정해졌다. 사관학교, 연세대, 서울대 등이 주요 대상 학교였다.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촌뜨기(?)로 간주됐다. 두근대는 소개팅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상대방을 정하는 방법으론 시를 이용했다. 노천명의 시 사슴 중 '모가지가 길어'를 한 쪽지에 적고 나머지 '슬픈 짐승이여'를 또 다른 쪽지에 적어 상대를 정했다. 시 한 편이 운명의 상대를 정해줬다. 소양정과 공지천 이디오피아 길은 데이트 코스였다. 제방으로 줄 맞춰 핀 코스모스 길은 20대 청춘들의 흔들거리는 마음을 닮아 하늘거리며 분위기를 띄웠다.

1968년 신입생 환영회는 잊을 수가 없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만 보던 트윈 폴리오가 온다는 소문으로 스무 살 소녀 가슴을 흔들었다. 당시 윤형주는 오지 않고 송창식만 와서 '하얀 손수건'을 불러 아쉬움을 달랬다. 첫 교외 공연 행사가 1971년 소양극장(춘천시청 옆 피카디리극장)에서 올려졌다. 합창공연이었는데 발 디딜 틈 없이 찾아온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과별 대항으로 열린 체육대회는 장기자랑을 겸했다. 가장 행렬, 세계 민속무용 등으로 장기자랑을 펼쳤다. 휴지로 드레스를 만들고 문창호지를 염색해 운동장에 널어 놓았다가 바느질로 재단해 의상으로 사용했다. 전체 평가는 교수, 교직원들이 평가해 1등을 뽑았다.

당시 자주 가던 장소는 커피집은 피앙새와 전원다실이었다. 피앙새는 현대적인 감각을 갖춰 인기가 높았고 저녁엔 생맥주를 팔아 여대생을 만나려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전원다실은 그에 반해 클래식한 공간으로 인식됐다. 중국 음식을 팔던 자유궁(독일제빵 부근), 소양극장 주변의 코로나 호떡집, 중앙시장 내 양키시장은 초콜릿, 과자 등 서양 문물을 접하는 공간이었다. 북한강을 따라 이어진 경춘선은 청춘들의 설렘을 운반했다. 강촌이 수도권 대학생들의 MT 장소로 각광받으면서 춘천의 낭만은 세대를 이어 갔다.

춘천 낭만의 밀알을 심었던 성심여대는 1974년 경기도 부천시 역곡동에 분교를 설립하면서 1, 2학년은 춘천에서 3, 4학년이 되면 부천으로 이전을 준비했다. 1982년 춘천 교사를 폐쇄하고 부천으로 이전, 통합됐고 1992년 성심여자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됐고 1994년 가톨릭대학교로 병합됐다.

김남덕·오석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