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수립 후 간-직-간접투표 오가 1987년 13대서 현 선거제도 정착 직선제 시행에 입후보자 크게 늘어 세 과시위해 지지자 버스 싣고다녀 유세후 전단지 바닥 가득 메우기도 제20대 대통령선거(이하 대선)가 모두 마무리됐다. 헌법 제68조 1항(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는 때에는 임기 만료 70일 내지 40일 전에 후임자를 선거한다)에 따라 치러진 선거이지만 선거 과정에서의 극한 대립과 사전 투표 과정에서의 준비 미흡에 대한 지적들이 겹치고 이어지면서 다소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특히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는 유쾌하지 않은 닉네임까지 얻으며 진행됐으니 앞으로 기록될 우리 정치사에서 이번 대선 과정이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지 주목된다. 우리의 대선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간접-직접-간접선거가 번갈아 시행돼 오다 1987년에 이르러 비로소 현재와 같은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정착하게 된다. 이번 대선은 사전투표율이 역대 최고치인 36.93%를 기록하면서 최종 투표율이 25년(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80.7%) 만에 80%를 넘을 것이냐에 대한 전문가들의 설왕설래가 많았다. 이와 관련, 역대 대선 기록들을 살펴보면 예상치 못한 투표율 기
강원일보 창간 75주년 취재사진 현장 속으로 1987년 속초 아바이마을 전후 실향민들 고향 가까운 속초 정착 지역인구 70% 차지 市 승격에 큰도움 모래사장에 집 짓고 갯배로 시내 오가 드라마 촬영 후 속초 대표관광지 등극 강원도는 분단의 상처를 안고 사는 곳이다. 접경지역을 비롯한 도내 곳곳에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이 또아리 틀고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도내 곳곳에 분단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백사장 모래알만큼 많은 사연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그 중 속초 아바이마을은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 마을의 대명사로 아픈 손가락이다. 수복된 속초는 북한을 고향으로 둔 실향민들이 다수 유입돼 전체 인구의 70% 정도가 6·25전쟁 이후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구성될 만큼 분단사를 품고 있다. 실향민의 유입은 1963년 시로 승격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전쟁이후 수복된 속초지역에 대한 배려로 승격 당시 시의 인구 하한선 5만5,000명에 미치지 못했지만 정책적 배려가 있어 속초시로 승격됐다. 실향민들이 속초에 정착한 이유는 몇 개의 설이 있다. 첫 번째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빨리 가려는 심리적 요구라는 설, 두 번째 바다에 고기가 많이 잡혀 생활고를 해결할 수 있
춘천향토제 '수심가' 입상 가수 꿈꿔 1969년 신중현에게 곡 받아 첫 앨범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유행어도 1974년 7월13일 도체육회관서 공연 '당대 최고 스타 보자' 구름 관중 몰려 긴급조치 9호로 가수활동 금지되기도 올해는 유독 비가 많이 내린다. 봄철 대형 산불로 트라우마를 갖고 사는 강원도 사람들에겐 무척이나 반갑다. 봄비를 부른 가수는 여럿 있지만 김추자의 '봄비'는 애절한 보이스가 가슴을 파고드는 매력 때문에 사랑을 받는 레전드 곡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서 대중가요를 평가하곤 한다. 대중가요를 우습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시대상을 담는 중요한 매체(?)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 1970년대 대중들의 마음을 파고들며 전국을 강타한 스타가 있었다. 김추자는 원조 섹시 디바 가수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노래하는 모습은 대중들에게 충격이었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당시 노래는 예전에 없던 새로운 장르였다. 당시 유행하는 트로트와는 판이하게 다른 멜로디와 창법, 한국적인 록을 선보였다. 시원스럽게 불러 젖히는 노래는
영월 시가지 80% 물에 잠겨…3만여 주민 중 이재민 1만7천명 교통·통신·전기 끊겨…고사리손 학생들까지 나서 복구 도와 큰 재난 속 희망 잃지 않은 이유…역경 함께 극복한 이웃 덕분 강원도 기자들은 1년 동안 겪어야 하는 통과 의례(?)가 있다. 봄철은 강풍과 더불어 오는 대형산불, 여름·가을은 수해, 겨울은 폭설이다. 반복해서 일어나는 자연재해는 기자들을 단련시켜 4년 차 기자가 되면 스폿뉴스 취재 달인으로 성장한다. 과거 물관리가 전무했던 시절, 폭우는 인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재해였다. 1972년 8월 폭우는 3만여명의 영월군민 중 1만7,000여명을 수해민으로 만들었다. 생명과 집을 비롯한 자재도구는 불어난 동강이 휩쓸고 갔다. 신문이란 타임머신을 타고 그날 자연재해 속으로 들어간다. 아래는 강원일보 1972년 8월22일자 1면에 실린 기사다. 지난 18~19일 도내 전역에 내린 폭우는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내고 도시를 휩쓸어 처참한 모습을 만들었다. 특히 영월읍내는 전국에서도 제일 처참한 수마의 화를 당해 3만여명의 주민 중 1만7,000여명의 이재민을 냈으며 36시간동안 '하늘에서 동이로 물을 붓는 것'처럼 내린 폭우는 동강을 가로질러 함백
춘천 강촌이 1970년대 대학생들의 핫한 MT 장소로 등극하기 전, 우리나라, 대만, 일본, 미국 등 4개국 청년들이 1968년 여름 한적한 시골마을인 강촌을 찾았다. 강촌은 구한말 화서학파의 학풍이 이어져 이소응 의병장을 배출한 곳이자 항일의병 활동의 거점으로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남다른 곳이다. 이런 마을에 일본 학생의 등장은 주민들에겐 뜨거운 관심으로 떠올랐다. 강촌역~서울 청량리 100원 신남역은 15원 하던 시절, 군데군데 초가·함석지붕 주택 길 여가리 밭엔 콩·옥수수 뿐 저 멀리 경춘선 철길만 외로이 한일국교가 정상화된 지 3년이 지난 여름날, 강촌으로 외국인들이 몰려왔다. 동네 벌거숭이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캠핑장을 찾았다. 가난하고 소박한 농촌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눈부신 흰옷을 입고 있다. 넉넉한 시골 인심과 남을 배려하는 깊은 품성은 어느새 이질적인 다름의 문화를 무력화시켰다. 이 국제학생캠프에 일본인 학생을 이끌고 온 노무라 모토유키는 마을 풍경은 물론 참가자들의 활동을 사진집 '강촌에 살고 싶네(눈빛출판사)'로 발간했다. 타임머신이 된 사진집은 반세기가 넘는 53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현장 한복판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그 시절 '텔레비전'은 요술상자 온 동네 아이들 줄 맞춰 앉아 희극배우 배삼룔 연기에 폭소만발 방송국 간 납치극 벌일 만큼 톱스타 고향 춘천 찾아 남철과 입담 폭발 극장 공연 수익은 성금으로 내기도 극장에서나 보던 공연이 상자 안으로 들어왔다. 어릴 적 TV라는 상자는 요술을 부리는 판타스틱 덩어리였다. 시골마을에서 텔레비전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저녁마다 요술상자를 만나러 가는 길엔 반드시 빈병 하나가 있어야 했다. 전기세 대용으로 받는 입장료다. 온 동네를 뒤지다시피 해 빈병을 구하면 행복감에 젖곤 했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마당에 멍석을 깔고 줄 맞춰 앉았다. 툇마루에 놓인 TV는 브라운관을 가린 차단막이 벗겨지고 꼴깍 삼킨 침과 함께 움직이는 영상이 나왔다. 1960~1970년대는 지금만큼이나 자고 일어나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였다. 전국을 돌며 입장료를 낸 시민들만이 관람하던 코미디극이 누구나 텔레비전만 틀면 안방에서 볼 수 있게 됐다. 희극배우가 전국적 인지도를 갖는 혁명 같은 사건이었다. 1969년 MBC가 개국하자 배삼룡은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한다. 집배원 역으로 출연한 배씨는 특유의 비실비실 걷다가 넘어지는 역으로 크게 인기
뿌리 깊은 남성중심적 현실 속 노동현장서 자신 영역 넓혀 가 코로나19 이후 세계 여러나라서 성불평등 악화 보고서 줄이어 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여성의 날은 1908년 3월8일 공황에 의한 경기침체로 생활고에 허덕이던 미국 여성섬유노동자들이 참정권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인 것으로 시작된다. 여성들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조차도 없었던 시절,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할 것을 당당히 요구했다. 그보다도 앞선 1898년 조선의 이 소사(결혼한 여성을 부르는 존칭)와 김 소사가 발표한 여권통문(女權通文)은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인간이라는 선언에 어어 독립운동가, 인권운동가, 우리나라 첫 여성 서양화가로 불리는 나혜석(1896~1949년)도 '이혼고백서'를 통해 가부장적인 사회에 반기를 들었다. 조선시대 강원의 여성으로 신사임당, 허난설헌, 전계심, 청심, 김금원 등은 기록으로 남아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인물이다. 아들을 대학자로 키워낸 신사임당(1504~1551년)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던 조선 사회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고 남성의 보조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했다.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였던 조선에서 간혹 진흙 속 진주처럼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1m 폭설에 전무후무한 고립 영동고속道 이틀간 완전 불통 800대 차량 뒤엉켜 꼼짝 못 해 승객 2천명 밤새 추위에 떨어 허기에 곤혹, 전쟁 피난처 방불 눈길 헤쳐 2km 절어 내려오기도 한겨울 영동지역의 폭설은 유명하다. 해마다 설 즈음에 내린 눈은 한꺼번에 많은 눈이 내려 교통에 큰 불편을 주곤 한다. “눈을 뚫어 길을 냈다”, “신영극장이 눈으로 무너졌다” 등 강릉은 눈으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1989년 1월11일 강릉에 1m가 넘는 눈이 내렸다. 그해 강원일보 1월13일자 사회면에 '1m 폭설 두 손 든 고속도로'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다. 1975년 개통 이후 14년 만에 영동고속도로가 이틀간 완전 불통됐다. 고속도로만은 막히지 않는다고 장담해 온 도로공사의 제설능력이 1m에 가까운 폭설에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제설장비 부족에 원인이 있으나 월동장구를 갖추지 않은 차량들이 뒤엉켜 도로를 지그재그로 가로 막는데는 속수무책이어서 한계점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차량 800여대의 승객 2,000여명이 고립돼 밤새 추위에 떨며 큰 곤혹을 치렀다. 이번 불통 사태로 대관령 폭설 대책이 제기됐다. 대설경보 속에 11일 새벽부터 눈이 내리
양양 오색케이블카 사업이 궤도에 오른다. 양양군이 40년 넘게 추진해 온 숙원사업인 설악산 오색케이블카가 지난 29일 국민권익위원회 소속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서 양양군이 환경부의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환경영향평가 부동의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제기한 행정심판 청구를 인용했다. 중앙행심위는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서 양 당사자 입장과 전문가 의견 청취에 이은 장시간 논의 끝에 환경부 원주지방환경청의 부동의 의견 통보가 부당하다는 취지의 결론을 내 오색케이블카 오색약수터∼끝청 구간 3.5㎞의 곤돌라 사업이 탄력을 받게 됐다. 설악호 이름 달고 시범 운행 6천만원 투입 18개월만에 완공 1,100m 구간 21인승 2대 왕복 요금은 1회 2백원, 왕복 3백원 수많은 관광객 실어 나르며 설악산 '국민의 산'으로 알려 궤도에 오른 양양 오색케이블카 다음 세대 물려줄 유산 되기를 우리나라 케이블카의 시작은 1962년 서울 남산 케이블카에 어어 1966년 부산 금정산 케이블카, 1971년 설악산 권금성 케이블카로 이어진다. 설악산 권금성 케이블카는 힘든 등산 고행을 하지 않고도 쉽게 설악산 자락을 감상하고 조망할 수 있는 대표적 관광자원이다. 2000년대 이후에 들어서 통영, 여수,
최북단 현내면 대진리 앞바다 괴선박 폭풍우 속 유유히 남하 포위 20분만에 격침, 1명 생포 북괴 만행에 아들 잃은 여인은 오열 속에 몸부림치고… 한적하던 어촌은 애통·분노 아! 야만스러운 냉전시대여 남북 접경지역에서 살아온 강원도민이라면 간첩이란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철책을 뚫고 내려온 간첩과의 교전, 동해안 어선 납북사건, 북 간첩선 출몰, 북 잠수함 침투사건 등 분단의 흔적이 남아 있는 강원도는 고스란히 역사에 남겨져 있다. 1975년 2월15일 고성군 앞바다에 간첩선이 나타났다. 이 사건은 2월17일자 강원일보 3면에 실려 있다. 당시 지면에 게재된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최북단인 고성군 현내면 대진리 앞바다에 북괴 무장간첩선 1척이 백주에 기습해 와 우리 해군함정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격침되고 1명이 생포돼 철통같은 동해안 경비태세의 만전을 또 한 번 과시했다.1975년 2월15일 하오 1시59분께 북방경계 한계선인 38도 37분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온 괴선박이 우리 공군 레이더망에 걸려들었다. 20노트의 속력으로 남하하고 있는 괴선박을 주시하라는 엄호가 각 경비정의 무선망을 통해 하달돼 주도면밀히 감시하던 끝에 59톤급(선체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