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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단독]'822억원 증발' 공공임대주택 부도 사태…'신탁 부실'에 두 번 우는 임차인

공공임대주택 피해자 횡령·배임 혐의로 신탁사 고소 예정
신탁 계좌에 넣은 분양 계약금 76억 피해
신탁사 책임에 따라 입주민 피해 회복 가능성도

 

부동산 투기 세력의 표적이 된 대구 달성군 유가읍의 한 공공임대주택(908가구 규모) 부도 사태와 관련, 이곳 임차인들이 '신탁 부실'로 두 번 울고 있다.

 

이곳 입주민 424가구는 횡령, 배임 위반 혐의 등으로 A 신탁사를 경찰에 고소할 예정이라고 26일 밝혔다. 이들은 A 신탁사가 입주민들의 계약금 관리를 소홀히 한 탓에 76억원의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이 신탁사는 작년 기준 누적 수주실적과 임직원 수에서 업계 1위로 평가받는다.

 

◆믿고 맡긴 신탁사였는데…사라진 76억원

 

입주민과 A 신탁사와의 악연은 지난 2020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당 공공임대주택 사업자인 B 건설사가 전남 무안과 전북 군산 등에서 보증사고를 낸 사실을 파악한 입주민들은 신탁사를 중간에 놓고 분양전환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건설사가 이를 받아들여 공공임대아파트 소유권은 건설사에서 신탁사로 넘어갔다. 이에 따라 분양 전환을 원하는 임차인 356가구가 계약금 1천340만원을 건설사 계좌가 아닌 신탁사 계좌로 입금했다. 68가구는 잔금을 포함한 4천200만원을 송금했다.

 

신탁사는 건설사 등 임대주택 사업자가 가압류 등 법적 조치를 당할 가능성이 있을 때, 임차인들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임대주택의 소유권을 넘겨받아 계좌를 대신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신탁사에 임대주택 소유권이 넘어가면 건설사 측 채권자가 함부로 권한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A 신탁사는 건설사를 대신해 계약금을 잘 관리하겠다며 입주민들을 안심시켰다. 한 입주민이 신탁사에 전화를 걸어 "신탁 계약 내용이 뭐냐", "우리가 낸 계약금은 어디에 쓰이는 거냐"고 묻자, 신탁사 직원은 "우리가 입주민들의 돈을 잘 보관했다가 주택도시기금을 갚는 등 분양에 필요한 데 쓸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입주민들의 계약금은 보관되지 않았고, 주택도시기금을 갚는 데 사용되지도 않았다. 입주민들이 입수한 신탁사 계좌 내역에 따르면 2020년 6~7월쯤 3차례에 걸쳐 분양과 전혀 상관없는 무역회사로 5억3천만원가량이 빠져나갔다. 이 무역회사는 현재 분양 전환 사기 혐의로 구속된 B 건설사 신모 전 회장의 아들이 대표로 있는 곳이다. B 건설사의 현 대표인 강모 씨가 사내 이사로 등록된 곳이기도 하다.

 

이후로도 약 7개월 동안 알 수 없는 계좌들로 돈이 계속 새어 나갔다. 무역회사 외에는 입주민들도 돈이 빠져나간 계좌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2020년 12월 무렵 신탁 계좌에는 입주민 분양 전환 계약금 77억원 중 약 76억원이 빠져나가 1억2천만원만 남았다.

 

임차인들이 신탁사에 맡긴 돈을 건설사가 유용한 정황은 검찰 수사로도 확인됐다. 신탁사 계좌에서 사라진 76억원 가운데 35억원 상당을 건설사가 임의로 사용한 점이 확인되어 검찰 기소의 대상이 된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분양대금의 잔금을 주면 소유권을 이전해주겠다"고 분양신청자 210명을 속여 35억원 상당을 신탁사 계좌로 입금하게 하고 신탁사로부터 그 자금을 인출해 유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문제는 검찰이 기소한 35억원뿐만 아니라 사라진 76억원 전체에 대한 피해 회복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보증보험에 가입한 가구라도 임대보증금보증 약관에 따라 분양 전환 관련 대금은 보장하지 않는다. 입주민 대표 박대규(54) 씨는 "국내 굴지의 신탁사라 믿고 계약을 체결한 것인데 이렇게 장난칠 줄 몰랐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석연찮은 인출 과정…횡령·배임 혐의 입증 관건

 

이에 대해 신탁사는 건설사 등 외부로 돈을 보낸 것은 계약상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건설사가 부도나면서 돌려받지 못한 채권 금액이 수백억원에 달해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신탁사 관계자는 "은행에서 계좌를 만들면 돈을 넣고 뺄 수 있듯, 우리도 건설사가 요청하면 계약에 따라 돈을 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수사와 재판이 진행 중인 사항이라 공식적으로 답변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실제 신탁법에 '외부로 돈을 보낼 수 있다, 없다'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있는 건 아니다. 건설사가 신탁사에 필요한 금액과 용도를 적어내면 신탁사가 확인하고 돈을 내주는 구조다. 취재진이 변호사 3명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모두 신탁사가 신탁법을 어긴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신탁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인출 과정은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부동산 관련 법 전문인 박상흠 변호사(법무법인 우리들)는 "건설사가 신탁 목적에 맞지 않게 자금을 요구했다는 걸 알면서도 신탁사가 돈을 내줬다면 횡령이나 배임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탁업계에서도 신탁 계좌에 맡긴 돈이 범죄에 악용된 점은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한 민간 부동산신탁사 관계자는 "분양자들이 소유권을 이전하기 전에는 건설사도 신탁 계좌 돈을 가져갈 수 없다"며 "건설사가 신탁 계좌에서 필요한 비용과 용도를 적어낸다 해도 신탁사는 분양과 관련된 비용만 집행한다. 세금을 내야 하는 경우에도 신탁 계좌에 있는 돈이 아니라 건설사가 따로 납부한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신탁사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횡령‧배임죄는 묻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성진 대구가톨릭대학교 부동산학과 교수(민사법 전공)는 "횡령죄가 성립하려면 건설사와 신탁사가 공모했다는 게 입증돼야 하는데, 이런 쟁점들은 결국 수사 기관이 밝혀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신탁사의 책임 유무에 따라 입주민이 피해를 보상받을 새로운 길이 열릴 가능성도 있다. 현재 이 공공임대주택의 공실 180여 가구는 경매 절차가 진행 중이다. 경매로 발생한 배당금은 아파트를 지을 때 빌린 주택도시기금을 갚고, 밀린 아파트 관리비를 변제하는 데 먼저 사용된다. 이후 남은 돈을 소유권자와 임차인이 나눠 갖는다.

 

하지만 이때 신탁사가 소유권자일 경우, 신탁사는 신탁 계약에 따라 배당금을 먼저 가져가겠다고 나설 수 있다. 입주민 측 법률 대리를 맡고 있는 박태현 변호사는 "민사적으로 신탁 계약 자체가 무효가 되면 아파트 소유권이 신탁사에서 건설사 명의로 돌아가고, 이미 건설사를 상대로 하자보수 소송 등을 진행 중인 입주민들이 손해를 배상받기가 더 쉬워진다"고 설명했다.

 

※대구 달성군 공공임대주택 사기 사건 개요=부동산 투기를 노린 부실 건설사의 부도로 822억원에 달하는 공공임대주택 임차인의 보증금이 증발했다. 해당 건설사는 공적 자금인 주택도시기금과 공공임대주택법의 허점을 악용해 지난 2018년 단돈 5천만원으로 908가구에 이르는 공공임대주택을 사들였고, 전남 무안과 전북 군산 등에서 비슷한 보증 사고를 냈다. 이 과정에서 해당 건설사 임직원들이 임차인 263명을 속여 분양 전환 대금 약 73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해당 건설사는 재판 과정에서 10억원이 넘는 이자 등을 연체하며 부도 처리됐다. 임차인들은 부도가 난 건설사를 상대로 희망 없는 소송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