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강릉 14.6℃
  • 맑음서울 16.7℃
  • 구름많음인천 15.3℃
  • 구름조금원주 19.8℃
  • 맑음수원 15.9℃
  • 맑음청주 19.0℃
  • 맑음대전 16.9℃
  • 맑음포항 13.4℃
  • 맑음대구 14.7℃
  • 맑음전주 18.4℃
  • 맑음울산 12.2℃
  • 맑음창원 15.2℃
  • 구름조금광주 17.8℃
  • 맑음부산 12.9℃
  • 구름많음순천 14.7℃
  • 맑음홍성(예) 17.3℃
  • 구름많음제주 16.1℃
  • 맑음김해시 13.4℃
  • 맑음구미 15.1℃
기상청 제공
메뉴

(강원일보) 태극기 흔들며 미소짓는 장병들…무사귀환 바라며 떠나보낸 그날

[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

 

강원일보 창간 77주년 취재사진 현장속으로

1971년 춘천역 파월장병 환송식

 

8년여간 파병 군인 32만명 화천 오음리서 4주간 실전 훈련
교육 마치고 춘천~서울~부산 거쳐 베트남 이동 전선 투입
참전 대가 美 경제 원조 … 고엽제 피해 문제 등 상처로 남아


1971년 12월 춘천역에서 월남전에 참전하는 군인 환송식이 열렸다. 기차 안은 오음리7보충단 파월교육대에서 훈련을 마친 병사들로 가득 찼다. 기차 옆으로 교복 입은 학생들과 전장으로 떠나는 백마부대 장병들 손엔 태극기가 들려 있다. 환송식에 참가한 시민들은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며 무사귀환을 기원하고 있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한국 정부에 월남파병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월남전 파병은 6·25전쟁에서 미국과 자유우방에게 받았던 도움에 대한 빚을 갚고 주한미군을 월남으로 빼돌리려는 미국 측의 의도를 사전 봉쇄시킨다'는 취지로 1965년 8월13일,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월남파병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어서 8월16일, 김성은 국방부 장관은 파월전투사단부대 창설명령을 내리고 채명신 소장을 파월부대 사단장으로 선임했다.

1965년 10월3일 해병 제2여단으로 구성된 청룡부대가 부산항 제3부두에서 2만5,000톤급 미 해군 수송선 카이저호를 타고 선발대로 출발했다. 그 후 4월 수도사단과 제26연대가 추가로 파병되고 교대병력을 1년 단위로 파병하면서 화천 오음리가 베트남 파병기지로 자리 잡게 됐다. 오음리는 8년여 동안 32만명이 목숨을 건 대장정의 출정기지였다. 산악능선이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싸인 이곳에서 참전 용사들은 뜨거운 한여름 땡볕에서, 한겨울 눈보라의 악조건을 견뎌 가며 체력을 단련하고 전투기술을 연마했다.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장병들은 이곳에서 4주간의 실전 훈련을 받았다. 교육 후 저녁이면 담을 넘어 동네 오두막집에 가 술잔을 기울였다. 교육생의 교번은 마치 현금과도 같았다. 외상장부에 훈련이 끝나자 짊어지고 온 더블백과 낡은 소지품들은 월남전에서 쓸 쌔옷과 정글화로 교체됐다. 사단 견장을 달고 월남에서 필요한 수첩과 인식표 두 개씩을 지급받고 유언장을 써내려 갔다. 작은 봉투에 손톱과 발톱을 깎아 넣고 머리카락도 몇 개 뽑아 넣는다. 부대 막사 주변의 흙을 한 움큼씩 움켜쥐고 봉지에 담는다. 고향의 흙을 보며 향수를 달랠 이유도 있었지만 흙냄새를 맡으면 멀미를 안 한다고 해서 거의 모든 교육생은 흙을 소지품처럼 챙겼다. 모든 절차를 마치면 1년치 봉급 4,320원(당시 상병 봉급 월 360원)이 지급됐다. 저녁식사로 나온 통닭 한 마리가 투입이 임박했음을 예고했다. 연병장에 집합하니 교육생들을 태우러 온 차량들이 길게 줄지어 섰다. 흙먼지를 날리며 배후령을 넘어 춘천역에 도착했다. 춘천역은 학생들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나와 전장으로 떠나는 병사들을 위한 환송식 준비가 한창이다. 태극기를 손에 든 환송 인파가 기차 옆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춘천 환송식을 마친 기차는 서울로 향한다. 망우리역에 정차하자 배웅 나온 가족들이 아들, 오빠, 형, 동생을 찾는 목소리로 야단법석이다. 만남의 기쁨도 잠시, 이별이 시작되자 장병들의 눈에는 붉게 노을이 졌다. 기차는 서울역에 도착해 가족 상봉과 이별식을 치렀고 이어 부산역으로 떠났다. 10층 높이의 수송함은 오색 색종이를 길게 늘어뜨리고 장병들을 맞았다. 장병들은 난생처음 엘리베이터를 타며 신문물을 접했다. 이어 선실식당에서 고기, 소시지, 과일 등 양식과 C-ration(시레이션)이라는 비상식량을 접했다. 시레이션 안에는 비스킷, 코코아, 담배, 껌, 버터 등이 들어 있었으며 며칠 먹다 보면 김치가 얼마나 훌륭한 음식인지를 깨달았다. 일주일 항해하는 동안 뱃멀미는 전쟁으로 가는 첫 번째 고통이었다.

청룡부대는 호이안을 거쳐 2차 주둔지를 추라이에 잡았고 맹호 기갑부대는 푸캇, 맹호사단은 퀴논, 맹호 26연대는 송카우, 백마 28연대는 투이호아, 백마사단은 난호아, 한국 야전군 사령부와 십자성부대는 나트랑, 백마 30연대는 킹란, 주월한국군사령부는 호찌민에 각각 위치했다.

월남전은 전선이 없는 산발적인 게릴라전이다. 헬리콥터 기동력, 전투기의 폭격, 포병부대의 대포가 주력화기로 사용됐다. 전후방이 따로 없어 정글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노리는 것 같은 긴장감을 소지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

고국에서 일주일에 한두 편씩 한국영화 16㎜ 필름을 보내주는 날이면 장병들은 강당에 모여 모처럼 긴장감을 푼다. 특히 통신대 영사병 임무를 부여받은 장병은 미군부대 영화 필름창고에 가서 손짓 발짓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미국영화 필름을 빌려와야 했다.

고국에서 위문단이 오던 날은 그야말로 잔칫집 분위기다. 벌건 대낮에 위문쇼가 진행됐다. 남진, 진송남이 왔지만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은 여가수와 무희들이었다. 한명숙의 “노오란 샤스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가 울려 퍼지면 ‘앵콜(앙코르), 앵콜'이 귀를 멀게 만들 지경이었다.

1973년 3월23일 우리군은 최종 철수할 때까지 8년8개월 동안 연인원 32만4,864명이 참전했다. 베트남 파병으로 우리 정부는 ‘브라운각서'를 통해 한국군의 현대화와 경제 원조를 미국으로부터 약속받았다. 이 각서에 따르면 미국은 월남 파병에 따른 장비와 각종 경비를 한국군에 제공하고, 파월 장병들의 급여도 지불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월남전 참전 9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받는 해외근무 수당 중 5분의 4를 차지하는 2억여 달러가 국내로 송금됐다. 이것은 그 당시 국내 총 외화 획득의 20%를 차지했다.

월남전 참전 대가로 얻은 월남특수로 수출과 군납, 용역 및 건설로 민간 파월 기술자가 국내로 송금한 간접수입액이 무려 7억여 달러로 국내 총 외화 획득의 80%를 차지했다. 월남전은 한국경제 발전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지만 고엽제 피해, 라이 따이한, 학살 등 전쟁 중에 일어난 상처는 아직도 치유해야 할 숙제로 남겨져 있다.

김남덕 사진부국장

 

많이 본 기사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