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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호남 의병이야기] 구한말 외로운 전쟁에 나선 의병장들 <6>대동창의단 대장 해산 전수용

1908년 영광 불갑사에서 ‘대동창의단’ 결성 의병항전
장성·영광·나주·부안·함평 등 호남중서부지역서 활동
1909년 의병토벌작전에 해산…진안서 밀고로 붙잡혀
1910년 대구교도소에서 순국…1962년 건국훈장 추서

 

“만고의 충의는 성재 기삼연이라면 일세의 영걸은 태원 김준이니 조경환과 김준 두 장수 죽어가는 날 천지의 큰 공은 해산 전수용일세.”

1909년 대한매일신보 호남지방편에 게재된 의병에 관한 기사다. 전수용의 본명은 전기홍으로, 호는 해산이다. 1878년(고종 16년) 10월 18일 임실군 둔남면 국평리에 사는 전병국씨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서울에 살다가 임실로 낙향한 전병국과 부인 경주 김씨는 5년이 지나도록 아기를 못 가졌는데, 어느날 백발노인이 쇠북을 치며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수용을 잉태했다. 당대 석학 이한룡에게 글을 배우고 글방친구인 이석용과 의기투합해 나라 걱정을 함께 했다. 기개 있는 청년으로 당대 유명 학자들을 찾아가는 유람에 나서 장성의 송사 기우만, 성재 기삼연, 태인의 면암 최익현을 찾아 경세와 구국의 방안을 들었다.
 

수용은 장성 수연산 석수암의 기삼연을 찾아가 호남창의소 종사에 임명된 후 임실로 돌아와 동지들을 규합했다. 1907년 겨울 200여 명을 모아 마이산 용바위에서 거병한 그는 임실 일본헌병대를 기습했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해 3명의 동지가 희생된 채 후퇴했다. 의병들이 하나둘 흩어지자 진안으로 돌아온 수용은 기삼연 체포, 김준 전사 등의 소식을 듣고 김준의 휘하에 있던 오성술과 재기를 도모한다. 김준의 선봉장인 조경환도 잔류 병력과 합류하면서 다시 세를 이루자 수용은 영광으로 가 의병들을 규합했다. 이 때 정원집(군대 해산에 반발하다 신안 지도로 유배 간 한국군 장교)도 30여 명의 군인을 데리고 찾아왔다.

 

 

 

1908년 7월 영광 불갑사에서 수용은 대동창의단을 조직했다. 대장은 수용이 맡고, 선봉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 후장군 윤동수, 호군장 박영근, 도포장 이범진, 척후장 임장택, 도총장 김성채, 참모장 이봉래, 참모 이영준·김돈·김공삼·김원국·이성화 등을 임명했다. 400여명의 의병은 구국토적을 다짐하며, 충분한 병기와 군량을 모아 불갑산으로 향했다. 이 때 일본군이 추격해왔으며, 불갑산 어귀에서 맞부딪혔다. 일본 기마병이 매복 작전을 쓰자 정원집이 천보총(조선 중기에 발명된 총의 하나)으로 20여 명의 일본군을 저격하기 시작했으며, 7~8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본군은 그대로 도주했다. 이에 수용은 행군의 방향을 불갑산이 아닌 함평으로 바꿔 일본군을 속인 뒤 밤에 다시 오성술의 근거지인 나주 석문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내부 밀고자로 인해 이동경로가 노출되면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으며, 수용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자 일본군은 무기들을 남겨둔 채 후퇴했다.

수용이 백성들을 아낀다는 소문에 의병에 합류하는 주민들이 늘어나자 1908년 9월 나주에 진입해 한 마을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이 때 주민들이 소를 잡아 바치기도 했다. 총을 잘 다루지 못한 의병 중 한 명이 오발 사고를 내 아이가 부상을 당하자 수용은 군자금 30냥을 주며 치료하게 하는 등 백성들의 불편을 줄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10월 16일 영산포 부근에 90여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습을 궁리하던중 일본군이 기습작전에 나섰다는 보고를 듣자 수용은 매복을 지시했다. 수용은 5~6m 내에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제 사격을 가해 일본군 3명이 고꾸라지면서 총격전이 시작됐다. 일본군이 뒤로 물러서자 아군 역시 영산재에서 덕령을 넘어 양지부락에 도착해 유숙했는데, 의병 중 3명도 총상을 입었다. 나주의 순사대장인 정득주를 처형하기 위해 출동한 조경환이 돌아오고, 박경화는 시계와 망원경을 가져와 합류했다. 어느새 다가온 일본군이 의병을 포위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굶은 의병들이 지쳐가자 수용은 정원집에게 일본군을 공격하도록 하고 후퇴했다가 기습해 20여 명의 일본군을 쓰러뜨렸다.

규모와 무기 면에서 절대적인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악전고투 끝에 승리를 거둔 수용은 각 지역에 격문을 보냈다. 이후 함평, 영광, 장성 등으로 옮겨 다닌 뒤 1908년 10월 24일(음력) 광주에 주둔하다가 광주와 담양 접경인 대전면의 한재에 일본군이 있다는 소식에 출동했다. 당시 일제는 남한대토벌작전을 위해 정규 일본군을 투입했는데, 30여 명 정도의 1개 소대가 한재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에 수용은 정원집에게 정예병을 선발해 먼저 포격하게 한 뒤 공격에 나섰는데, 기습 포격을 받은 일본군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을 돌담 뒤에 숨어 반격에 나선 일본군과 시가전이 계속됐는데, 일본측의 지원군이 온다는 소식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수용은 장성으로 가는 척 하다가 담양 자은동으로 가 전투를 시작해 30여 명의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5연발총 5정, 탄환 650발, 군복 등을 노획했다. 추격에 나선 일본군과 자은동에서 다시 전투를 하던 수용은 의병들이 지쳐가자 다시 철수에 나섰다. 휴식을 취하던 수용은 함평 고막원 인근에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정원집에게 50여 명을 이끌고 야습할 것을 명령, 5~6명의 일본군을 죽이고 돌아왔다. 그런데 합류하는 과정에서 오발사고가 있었고, 이를 일본군 공격으로 안 의병들이 일제 사격을 하면서 선봉장 정원집이 전사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정원집의 전사와 계속되는 일본군과의 혈투 속에 의병 수가 50여 명까지 줄어든 상태로 영광쪽으로 향했으며, 두 명의 포수가 의병에 합류해왔다. 고창 명곡마을에서 따뜻한 대접을 받은 수용에게 한 노인이 찾아와 서둘러 몸을 구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일본군들이 추격을 계속하는 가운데 영광 불갑산의 멸재라는 산봉우리에 매복한 의병은 일본의 선제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1909년 2월 5일(음력) 오전 10시 30분께 일본군 기마병 3명이 정찰을 왔다가 기습공격을 받고 2명이 사살되고 1명은 치명상을 입고 도주했다.

 

 

 

수용은 사호(현재 함평군 해리면)에 들러 송림촌으로 진을 옮겼으며, 새옷을 구해 휘하의 박영근에게 건넸다. 당시 수용을 비롯한 의병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는데, 마을 주민들은 돼지를 잡아 의병들을 대접하기도 했다. 송림촌에서 보초를 서던 의병들이 수상한 장사꾼 8명을 붙잡아왔는데, 심문 끝에 영광의 일본헌병대 밀정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수용은 동족이어서 죽일 수 없다고 용서하자 이들은 스스로 상투를 자르며 뉘우쳤다. 불갑산 해불암으로 온 수용은 주지스님인 해산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1909년 2월 18일 장성을 지나 갈재에 이르러 알고 지내던 김 노인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총장 이범진을 시켜 군막으로 초청했다. 김 노인과 함께 의병인 아우의 복수를 위해 의병에 참여하겠다는 청년이 같이 왔으나 부모님을 모실 것을 설득해 돌려보내고, 다시 신흥으로 이동했다. 병기가 부족했던 수용은 이범진과 함께 영산포에 무기를 구하러 가는 도중 나주읍을 공격한 박해영 형제가 일본경찰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동 도중 홍재도와 신창학의 편지가 도착했는데, 이 편지에는 유송여라는 사람이 도당들을 데리고 장성 운문암에 들어와 김여해(수용의 과거 동지)를 습격해 죽였다는 소식이 담겨있었다. 이에 격분한 수용이 길을 돌려 유송여가 있다는 고창으로 진격하다가 밤길에 방향을 상실하면서 7~8호가 사는 작은 마을을 발견, 농부 이영국의 집에 들어갔다.

군자금 20냥을 건네 사례를 한 뒤 다음날 부안으로 옮겨 머무르면서 일본군의 동태를 살폈다. 당시 일본군은 호남 의병들을 대토벌하기 위해 남하하고 있었다. 고창을 지나 영광에 도착한 수용은 여기서 일본군과 조우했는데, 1909년 3월 27일 일본군의 거센 공격에 중과부적으로 의병들이 쓰러졌다. 일본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수용은 안개 속에 5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나주로 도망쳐왔다. 농번기가 다가오자 의병을 해산시킨 수용은 전북 진안으로 향했다. 그가 집에서 글을 읽으며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호남 삼월에 오얏꽃이 지는데, 보국할 선생이 갑옷을 푸니 산새도 또한 시사를 아는지 밤새도록 나를 불러 놀아가라 하노라.”

1909년 4월 어느날 김현규가 찾아왔는데, 일본군을 대동하고 있었다. 현상금을 노리고 수용을 잡으러 온 것으로, 수용은 부인 김씨에게 부모 봉양을 부탁한 후 체포됐다. 광주감옥에서 대구감옥으로 이감된 그는 1910년 7월 23일 사형선고를 받은 후 32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그의 시체는 장수군 빈암면에 가장됐다가 마이산 기산묘에 배향됐으며, 1962년 건국훈장이 내려졌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찬, 전수용, 이기손,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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