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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폭정 못이겨 봉기한 농민 2만명, 관군·일제 협공에 장렬한 최후

백범흠 한중일 협력사무국 사무차장 (연세대 겸임교수)

 

 

청일전쟁 당시 동아시아 정세
메이지유신 성공한 일본 군비 증강 열올려
청나라는 실세 시태후에 휘둘려 국고 탕진
안에는 외척·밖에선 외세…망해가는 조선

일본, 조선왕실 장악후 청나라와 싸워 대승

반봉건·항일 혁명 ‘동학농민운동'
고부군수 탐학 시달려 전라도 농민들 봉기
전봉준의 지휘아래 조선관군 잇따라 격파
흥선대원군과 연계 한때 새정부 수립 꿈꿔
우금치전투서 일본군과 혈전 대부분 사망


#청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금이 가다

1853년 미국 페리 흑선(증기선)의 도쿄만 출현에 놀란 도쿠카와(에도) 바쿠후(幕府)는 개항을 결정했다. 바쿠후는 1854년 요코하마에서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 이즈반도 시모다와 홋카이도의 하코다테항을 개항했다. 바쿠후는 제정(帝政) 러시아의 남진에 대항, 1855년 러시아와 시모다 조약을 체결, 사할린섬(78,000㎢) 러·일 공유와 함께 쿠릴(치시마) 열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1863년 벌어진 초슈번(야마구치현)과 미·영·프·네덜란드 간 시모노세키해협 포격전은 치외법권(治外法權) 포함, 또 다른 불평등 조약으로 이어졌다. 4대 웅번(雄藩)의 하나로 꼽힌 초슈는 교토의 덴노(天皇)에 협력, 바쿠후를 타도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1867년 11월 초슈번과 사쓰마번을 대표한 기도 다카요시와 사이고 다카모리는 도사번 출신 사카모토 료마의 주선으로 삿초(薩長) 동맹을 결성했다. 삿초 동맹은 1868년 바쿠후를 타도하고 왕정복고와 개혁·개방을 요체로 하는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19세기 중반 일본은 △세계 은(銀)생산량의 약 3분의 1 △도시화율 세계 1위(도쿄 100만 명, 오사카와 교토 30만~40만 명) △구미(歐美) 정보 유입 등 개혁·개방을 추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은 조선과 달리 세계를 베이징 중심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은 1875년 오츠크해 도서에 대한 러시아와의 이견을 조정,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하여 사할린에서는 손 떼는 대신 캄차카반도와 홋카이도 사이 1,300㎞에 걸쳐 펼쳐진 쿠릴열도 56개 섬(1만5,600㎢) 모두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했다. 한편 사쓰마번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1609년, 바쿠후의 승인을 받고 군대를 출동시켜 총면적 2,712㎢(제주도의 1.5배)의 류큐 열도를 점령했다. 사쓰마번은 가까운 아마미 제도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만들어 직접 통치하는 대신 류큐의 명목상 독립은 유지시켜 줬다. 류큐는 처음에는 명(明), 나중에는 청(淸)과 사쓰마번의 양속(兩屬)상태가 됐다. 일본은 청(淸)의 국력이 소진될 기미를 보이던 1879년 류큐를 병탄했다. 청나라 중심 동아시아 조공 질서에 금이 갔다.

#흥선군 잇따른 외세 침략에 척화 기치 세워

1866년(병인년) 프랑스군에 이어 1871년(신미년) 미군이 강화도를 침공했다. 대원군 이하응이 통치하던 조선은 성리학자들의 요구에 따라 척화(斥和)를 내걸었다. 1871년 청과 일본은 대등한 조건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873년 민씨(閔氏) 외척세력이 집권한 후 조선은 제한된 개항정책을 취했다. 1875년 일본은 운요오호를 동원, 조선을 협박했다. 이듬해 일본은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 조선에 한 발을 들여놓았다. 청은 원산만으로 남진하려는 러시아 견제를 위해 속방(屬邦) 조선으로 하여금 1882년(임오년) 5월 제물포에서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케 했다. 1881년 주일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수신사 김홍집에게 건넨 ‘조선책략'은 러시아 남진 저지를 위한 청나라측 ‘외교전략'이었다. 1882년 7월 조정의 홀대에 분노한 조선 구식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청나라에 진압 지원을 요청했다. 청군은 군란을 진압하고, 용산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배후세력 이하응을 청으로 납치해 갔다. 그해 8월 청은 조선과 ‘상민수륙무역장정'(장정:청나라 국내용 문서라는 뜻)을 체결, 조선을 보호령으로 삼는 등 식민지로 만들어갔다. 1884년(갑신년) 12월, 일본과 가까웠던 김옥균과 홍영식, 서광범 등 소장 개혁파들이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청의 허를 찔러 친청(親淸) 민씨 정권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조선 주둔 청군 사령관 위안스카이가 병력을 지휘해 창덕궁을 포위, 3일 만에 개화세력과 일본군을 몰아내고, 고종의 신병을 확보했다.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으로 도주했다. 일본 공사관은 불탔고, 다수 일본인이 죽임을 당했으며, 다케조에 공사는 겨우 일본으로 도망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민족주의가 불타올랐다. 신문업의 발전이 이를 촉진시켰다. 공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군사력이 증강되기 시작했다.

#전봉준, 수탈 당하는 농민들의 중심에 서다

조선은 1860년대부터 1890년대 초까지 30여 년 간 절체절명의 시간을 허비했다. 같은 30년이라도 세계가 급속도로 변화하던 19세기 말 30년과 18세기까지의 30년은 크게 다르다. 1885년 청은 일본과 톈진조약을 체결, 조선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거나 파병할 때 사전 통보를 의무화하자는데 합의했다. 조선은 청과 일본을 함께 견제하고자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다. 청 해군은 독일이 건조한 정원(定遠)과 진원(鎭遠), 영국이 건조한 치원(致遠)을 포함한 대형 함선을 보유, 1891년까지 외형상 일본 해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일본은 톈진조약을 체결한 후 청과의 전쟁 계획을 수립하고 군비 증강에 사력을 다했다. 이에 반해 청나라는 해군력 증강에 사용할 예산을 실력자 시태후 환갑 축하를 위한 이화원 공사비로 돌려놓았다. 일본이 유럽 국가들에게 신형 함정을 발주하는 등 해군력을 증강하는 동안 청나라는 10년간 단 한 척의 함정도 추가로 확보하지 못했다. 1894년 2월 고부(정읍의 일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견디다 못한 전라도 농민들이 동학의 이름으로 봉기했다. 전봉준이 이끈 동학군은 5월 10일 정읍 황토현에서 관군에 대승을 거뒀다. 조선 조정은 충격에 빠졌다.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이 5월 28일 장성에서 동학군과 접전했으나 다시 대패했다. 동학군은 5월 31일 전주성을 점령했다. 민영휘(휘문의숙 창학자) 등 민씨 일파는 전봉준이 대원군(이하응)과 연결해 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커지자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톈진조약에 의거, 일본 정부도 파병을 결정했다. 리훙장은 1894년 6월4일 직례제독 예즈차오(葉志超)에게 조선 출병을 명했다. 일본은 대본영(大本營)을 설치, 전쟁에 대비했다. 가와카미 참모차장과 무쓰 외무장관 등 개전파가 대청정책(對淸政策) 주도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산둥반도에서 인천항까지의 거리가 큐슈에서보다 훨씬 짧다는 것을 고려, 청군이 출발하기 이틀전 오토리 주조(駐朝) 공사가 지휘하는 1개 대대를 출발시켰다. 청군 선발대 800명이 6월8일 아산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6월9일 수도 한양을 직공할 수 있는 제물포에 상륙했다. 조선 조정은 조선이 전쟁터가 될 것을 우려, 6월11일 동학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했다. 외국군이 조선에 주둔할 명분이 없어졌다.

#고종을 포로로 잡고 청나라에 전쟁 건 일본

오토리 공사는 많은 병력이 조선에 계속 주둔하면 청나라와 충돌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필수 병력만 남기고 쓰시마로 철수하자”고 건의했으나, 가와카미 참모차장과 무쓰 외무장관은 전쟁 불사를 주장했다. 리훙장은 가능한 일본과의 전쟁에 끌려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일본은 전쟁 구실을 만들고자 청·일 공동으로 조선의 정치개혁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청이 거부했다. 일본은 조선에 조·청(朝淸) 상민수륙무역장정 폐기 등 통첩을 하고, 한양의 청나라 총리공서를 공격했다. 일본은 7월23일 오시마 요시마사가 지휘하는 한양 주둔군을 동원,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과 민씨를 포로로 잡고 조선 정부에 청과의 국교를 단절할 것을 요구했다. 고종은 7월24일 이하응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7월25일 조선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폐기했다. 일본은 이하응에게 청군 격퇴를 요청한다는 요지의 국서를 보내 줄 것을 강요했다. 리훙장의 전략은 청군을 평양에 집결시켜 한양의 일본군 8,000명과 맞서는 것이었다. 리훙장은 예즈차오(葉志超)가 지휘하는 아산의 청군 3,500명을 평양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하지만 예즈차오는 평양의 청군을 증강하는 한편 아산의 청군도 증원해 한양 주둔 일본군을 남북에서 포위·협격하자고 주장했다. 온건파 이토 히로부미 총리는 무쓰 외무장관에게 아산 공격 중지를 지시했으나, 무쓰 장관과 가와카미 참모차장은 기호지세(騎虎之勢)라고 판단, 전쟁으로 밀고 나갔다. 리훙장은 임차한 영국 선박 등에 병력을 태워 아산으로 보냈다. 일본 해군은 7월25일 안산시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병사가 탄 선박을 기습했다. 청나라 병사 1,200명 모두가 익사했다. 기가 꺾인 청군은 7월29일 벌어진 성환(成歡) 전투에서 오시마의 일본군에 패했다. 8월1일 청나라와 일본 모두 서로 선전포고했다. 예즈차오는 성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거짓 보고하고는 충주, 춘천을 우회해 평양으로 도주했다. 리훙장은 성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예즈차오를 평양의 청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평양의 청군 지휘부는 리훙장의 조치에 실망했다. 예즈차오는 압록강까지 후퇴해 일본군의 보급로가 길어진 틈을 타 공격할 것을 지시했으나, 다른 장군들은 그의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9월13일 대본영을 히로시마로 전진시켰다. 9월15일 노즈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1만7,000명이 평양성의 청군 1만4,000명을 포위했다. 일본군이 탄약이 떨어져 후퇴하려는 순간, 예즈차오의 명령에 따라 청군이 성곽에 백기를 내걸었다. 청군은 조선에서 퇴각했다. 평양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리훙장은 9월 초 랴오둥반도 끝단 뤼순항을 통해 병력을 추가 파견했다. 일본 함대는 9월17일 압록강 하구 해상에서 청나라 북양함대와 조우해 5시간에 걸친 해전 끝에 북양함대를 대파했다.

#수만명의 농민이 흘린 피 산야를 뒤덮다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한편, 동학군과의 전투도 준비했다. 1894년 10월27일 이노우에 주조(駐朝) 공사가 새로 부임했다. 이노우에는 1,000여명의 보병으로 하여금 조선 관군을 지원, 동학군 공격에 나섰다. 전봉준 등이 이끄는 2만여 동학군은 1894년 11월18일~12월31일 공주와 천안 사이에서 기관총 등 신무기로 무장한 관군(양반 민병, 보부상 군대 포함)과 일본군을 맞아 혈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동학군은 12월4~7일 공주 우금치 일대에서 벌어진 이두황 등의 2,000여명 관군, 미나미 고지로의 200여명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화력 열세로 인해 참패했다. 동학군 전사자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지방이 산야를 덮어 멀리서 보면 산에 눈이 온 듯 했다. 그해 12월 청나라 북양함대는 일본 해군에 쫓겨 웨이하이(威海) 앞바다까지 도주했다.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는 베이징 공격을 주장했다. 야마가타의 폭주를 우려한 일본 정부는 야마가타를 노즈로 교체했다. 일본 해군은 비슷한 시기 타이완의 부속도서 펑후열도를 점령했다.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일본의 군사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취약해진 일본으로서는 가능한 조속히 전쟁을 끝내야 했다. 일본 해군은 1895년 2월 산둥반도 웨이하이를 점령하고, 류궁다오(劉公島) 앞바다에서 태평천국군 출신 제독 정여창이 지휘한 북양함대를 전멸시켰다. 그해 4월7일 미국의 주선으로 청·일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됐다.

편집=강동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