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악산 지세 험준 정약용이 눈여겨봐 고종의 이궁 품고 강원의 수부된 계기 레고랜드와 함께 지역관광 발전 선도 매출 일부 시 재정으로 환수된다는데 ‘관광진흥기금'으로 전환하는 게 순리 재투자 통한 춘천관광산업 발전 기대 춘천은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대통령 빼고는 다 배출했다는 서면 박사 마을을 중심으로 계관산, 경운산, 수리봉, 마적산, 대룡산, 금병산, 삼악산 등이 시계 방향으로 춘천을 촘촘히 에워싸고 있어 바람 한 줄기 빠져나갈 틈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 옛날 한양에서 춘천을 드나들 때는 삼악산 자락의 가파른 고갯길, 석파령을 넘어야만 했다. 그리고 석파령 외에는 뗏목이 내려가거나 거룻배가 거슬러 오던 북한강 물길이 있었을 뿐이다. 조카와 손자 혼사를 위해 이 물길을 두 차례 오갔던 다산 정약용은 이때 요새로서의 춘천을 일찌감치 점찍어 뒀었다. 이런 연유로 구한말 한반도 위기 때 고종은 자신의 몸을 의탁할 장소로 춘천을 찍어 이궁 설치를 지시했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궁 대신 아관파천을 택해 결국 춘천에 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궁 건설은 강원의 수부를 원주에서 춘천으로 옮기는 계기가 돼 도청 소재지 춘천을 태동케 한 결정적 역할을 하
퀴즈 맞춘 아이들에게 사탕 선물 흥미 유발 멧돌체험 제공해 더 생생한 교육 효과 기대 역마살 탓인지 살아오면서 직장도 여러 번 옮기고 이사도 자주 한 편이다. 심지어 해외 주재 근무도 십여 년 하고 해외여행도 80여 개국을 넘게 했으니 가히 지구촌 노마드라 할만하다. 그러나 춘천에 내려와 양지바른 맥국 명당, 신북에 둥지를 틀었으니 아주 뿌리를 내리면 좋으련만, 인생사 두고 볼 일이다. 춘천 맥국 터에 정착하고 보니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중 하나가 해설을 위한 출퇴근이 매우 용이하다는 것이다. 일곱 곳의 문화해설지 중 다섯 곳이 이 지역에 집중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막국수체험박물관은 걸어서 30여 분이면 닿을 수 있는 내 생애 가장 가까운 직장이다. 춘천 막국수체험박물관을 오가는 길은 율문천을 따라 걸어야 한다. 율문천은 사람들 발길이 아직 덜 미친 교외의 흔치 않은 생태 하천이라 걷기에도 그만큼 상큼하다. 그래서 신북 주민들은 직접 투표를 통해 율문천 생태계 보전을 지역 우선 사업으로 선정한 적이 있다. 아무쪼록 율문천 생태 보전이 주민 뜻대로 추진되길 소망하지만, 이 역시 지켜볼 일이다. 춘천 막국수체험박물관에는 막국수 만들기 체험을 즐기기
청일전쟁 당시 동아시아 정세 메이지유신 성공한 일본 군비 증강 열올려 청나라는 실세 시태후에 휘둘려 국고 탕진 안에는 외척·밖에선 외세…망해가는 조선 일본, 조선왕실 장악후 청나라와 싸워 대승 반봉건·항일 혁명 ‘동학농민운동' 고부군수 탐학 시달려 전라도 농민들 봉기 전봉준의 지휘아래 조선관군 잇따라 격파 흥선대원군과 연계 한때 새정부 수립 꿈꿔 우금치전투서 일본군과 혈전 대부분 사망 #청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금이 가다 1853년 미국 페리 흑선(증기선)의 도쿄만 출현에 놀란 도쿠카와(에도) 바쿠후(幕府)는 개항을 결정했다. 바쿠후는 1854년 요코하마에서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 이즈반도 시모다와 홋카이도의 하코다테항을 개항했다. 바쿠후는 제정(帝政) 러시아의 남진에 대항, 1855년 러시아와 시모다 조약을 체결, 사할린섬(78,000㎢) 러·일 공유와 함께 쿠릴(치시마) 열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1863년 벌어진 초슈번(야마구치현)과 미·영·프·네덜란드 간 시모노세키해협 포격전은 치외법권(治外法權) 포함, 또 다른 불평등 조약으로 이어졌다. 4대 웅번(雄藩)의 하나로 꼽힌 초슈는 교토의 덴노(天皇)에 협력, 바쿠후를 타도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땔나무, 숯, 생선, 소금을 싣고 한강을 따라 서울로 오르내리길 10년, 흉년에 쌀을 서울로 가져가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 사람이 있었다. 강을 이용해 장사하는 일을 주판(舟販)이라 했는데, 안석경(1718~1774년)의 ‘삽교만록'에 실려 있다. 주인공은 원주 법천에 살았으니, 바로 흥원창을 배경으로 한 장사꾼 이야기다. 인근 곡식모아 한양에 수납하던 부자동네 풍광 또한 빼어나 정약용·정범조도 찬사 한강은 물산과 인물을 소통시키는 매우 중요한 수로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흥원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섬강의 북쪽 언덕에 있으며 원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원주와 평창·영월·정선·횡성 등의 전세와 세곡을 수납하여 조운으로 서울에 가져간다.” 조선뿐만 아니라 이미 고려 때 조운제도가 있어서 남방 연해안과 한강 수로변에 12조창을 두고 조세로 징수한 미곡이나 포목을 선박으로 운송했다. 흥원창은 한강의 대표적인 창고였다. 조선 후기에 흥성했던 흥원창의 모습은 1796년에 정수영(1743~1831년)이 그린 ‘한·임강명승도권'에 남아 있고, 정약용의 시 속에도 살아 있다. 1819년 4월15일, 정약용은 큰 형과 함께 충주로 가던 중 흥원창을 지날 때 “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