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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강원 나무 기행]태평성대·풍농·풍어 기원 들어주던 용왕신 무사처럼 굳건히 수호

동해신묘 적송과 해송

 

도 기념물 제73호 안녕과 풍년 빌며 제사 올리던 곳
일제 문화말살정책 인해 철폐…양양군 1993년 복원
신묘 가는 길목 50년생 가늠 해송숲 방문객들 맞이
도 관찰사 남공철이 세운 기사비 옆 적송 자리잡아


농업의 시작은 어쩌면 인류에게 축복이자 재앙이다. 농업기술의 발달로 얻은 풍요는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불러왔고 잉여 농산물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사람들의 생명줄인 곡식은 땅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농경사회 사람들에게 땅과 곡식은 나를 낳아준 부모 다음으로 소중한 존재였다. 기록을 살펴보면 농업사회를 근간으로 이룬 나라들은 대부분 조상과 사직(땅과 곡식)에 제사를 올리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다.

조선은 동서남북 4곳의 신을 제후국으로 높여 극진하게 제사를 모셨다. 동쪽은 광덕왕, 서쪽은 광윤왕, 남쪽은 광리왕, 북쪽은 광택왕이라 부르며 사방의 산과 내에 제를 올렸다.

산천에 지내는 제사는 인간의 길화흉복(吉禍凶服)과 세상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자연신에게 홍수와 가뭄, 질병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해 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해신묘 주변은 부정을 막기 위해 개소리와 닭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철저히 민간의 접근을 제한했고, 국가 대사를 두고 지내는 제사라 온갖 정성을 쏟았다.

제사는 물의 신에게 옥을 던져 물속에 가라앉히는 하백신(河伯神) 제사와 섶을 태워 산천신에게 드리는 망제로 이뤄졌다.

백성들은 몸과 마음을 다해 제사를 지내 물고기가 무리 지어 잡히고 곡식이 많이 생산돼 근심걱정 없이 오래도록 살기를 기원했다. 또 영겁의 시간에 이르도록 바다와 하천이 청정해 태평성대를 누리기를 세상에 사는 모든 천지신명에게 간청했다.

동해신묘(양양군 양양읍 동해신묘길)는 동해의 용왕신에게 나라의 태평성대와 풍농,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다. 이 유적지는 강원도 기념물 제73호다. 신라 때부터 동해 용왕신에게 제사를 지낸 제단으로 고려 공민왕 19년(1370년) 강릉 안인포에 설치됐다가 성종 21년(149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으며 조선 초기에 중사(中祀·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로 대사 다음가는 제사)로 제정됐다. 동해신묘는 서해의 풍천(황해도 송화군), 남해의 나주지방과 함께 바다 신에게 매년 2월과 8월에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던 곳이다. 나라에서 직접 제사에 사용할 향과 축문을 내려보낼 정도로 비중 있게 봉행했다. 이곳 동해신묘는 조선 경종 2년(1722년)과 영조 28년(1752)에 양양부사 채팽윤(1669∼1731)과 이성억에 의해 건물이 다시 지어졌고, 정조 24년(1800년) 어사 권준과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의 요청으로 재차 중수됐다. 그러나 순종 2년(1908년)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비석이 잘리고 건물이 철폐되었다가 1993년 양양군의 복원사업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동해신묘 옛터에는 남공철에 의해 1800년에 세워진 동해신묘중수 기사비가 남아 있다. 동해신묘로 가는 길에 빼곡히 도열한 50년생 정도의 해송 숲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동해신 광덕왕의 위폐를 호위하듯 검은 줄기의 나무들이 철갑을 두른 가야 무사처럼 무게감 있게 서 있다. 그 사이로 적송 세 그루가 보인다. 해송들 사이에 자리 잡은 적송은 군계일학처럼 보인다. 붉은 줄기와 가느다란 솔가지들은 나무의 품격을 높인다. 시원한 눈맛은 소나무는 적송이 최고구나를 알려준다.

정조 24년(1800년)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이 지은 양양 동해신묘 중수기사비 옆으로 자리 잡은 적송은 해송에 비해 나이가 많다. 아마도 나중에 해송을 심으면서 적송이 듬성듬성 눈치 보며 서 있는 상황이 됐다. 예전에는 동해신묘 주변에 더 많은 적송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 동해신묘 주변은 개소리와 닭소리가 쉼 없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적송으로 뒤덮였던 곳은 해송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나무 세상이나 사람 세상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세상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그 빠름에 몸을 맡기자니 생각이 몸과 따로 논다. 솔숲 사이로 불어오는 해풍이 머리를 맑게 씻어주는 동안 동해신묘에 머리를 숙여 절을 올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글·사진=김남덕 사진부국장 kim67@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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