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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코로나 잊으려, 조선으로 떠나요… 전남 순천 낙안읍성

 

긴 장마 끝에 무더운 날씨가 이어진다. 전국 곳곳에 폭염주의보도 내렸다. 피서가 필요한데 코로나19도 다시 퍼지는 분위기다. 휴가는 시원한 공기를 느낄 수 있는 야외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다. 전남 순천 낙안읍성으로 달려간다.

 

태조 6년 왜구의 침입 대비해 쌓은 성

직사각형 전체 면적 22만 3000㎡ 규모

전통가옥 등 주민 90여 가구 실제 거주

 

이순신 장군 살린 수령 400년 은행나무

가야금·대장간·자연 염색 등 이색 체험도

 

■마음 푸근한 조선시대 읍성

 

너른 공원을 지나자 3·1독립운동 기념비가 나온다. 맞은편에는 고인돌공원이 보인다. 폭 3m 정도의 작은 해자가 흐르고 그 뒤로 성벽이 나타난다. 낙안읍성 성벽은 그다지 높지 않다. 4m 정도에 불과하다. 위압적이지 않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성 밖에 초가집 서너 채가 보인다. 빨래가 널려 있는 거로 봐서는 사람이 사는 모양이다.

 

성안으로 곧장 발걸음을 옮긴다. 한옥 형태의 문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동문인 낙풍루다. 이곳에는 문이 세 개 있다. 낙풍루 외에 남문인 쌍청루와 서문이 있다.

 

낙안읍성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조선시대 읍성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조선 태조 6년(1397년) 낙안 출신의 전라도 수군도절제사 김빈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흙으로 쌓은 성이다. 이후 세종 6년(1424년)에는 석성으로 바뀌었다. 200년 후인 인조 4년(1626년)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한 뒤 성을 중수했다.

 

낙풍루를 지나 성곽으로 올라간다. 일부 구간은 걸어볼 수 있게 돼 있다. 낙안읍성은 장방형이다. 성곽의 총 길이는 1410m 정도다. 읍성 전체 면적은 22만 3000㎡에 이른다. 성곽을 따라 큰 나무들이 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커다란 밤나무에는 아직 파란 밤송이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대추나무에는 알이 굵은 대추가 익어가고 있다. 지난 7일이 입추(立秋)였다.

 

 

 

성안에는 전통 가옥이 아직 즐비하다. 항아리 수십 개가 놓인 장독대가 눈에 띈다. 낙안읍성 안에는 민가 90여 가구가 있는데 실제 사람이 살고 있다. 각 가구는 초가집 2~3채와 마당, 텃밭으로 구성돼 있다.

 

길이 끊긴 성곽에서 내려오자 동헌이 보인다. 한 가족이 곤장 체험을 하고 있다. 아빠가 어린 딸에게 “누워 봐. 안 아프게 때리는 척만 할게”라며 웃는다. 딸은 “정말 안 때릴 거지? 사진만 찍는 거지?”라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아빠는 환하게 웃으며 몽둥이로 딸의 엉덩이를 살짝 건드린다. 엄마는 밝은 미소로 사진을 찍는다.

 

담쟁이 넝쿨과 잎이 황토 흙담을 뒤덮고 있다. 아래쪽 잎은 벌써 가을을 만난 듯 빨개졌다. 담장 밖에는 삼신할매 장승 두 개가 나란히 서서 곤장을 치는 가족을 보며 깔깔 웃고 있다.

 

낙안읍성 중심 거리는 한산하다. 마스크를 착용한 관람객들은 느긋하게 온몸으로 바람을 느낀다. 곳곳에 꽃이 피어 있다. 두 청춘남녀는 노란 금계국 옆을 지나며 ‘노란 사랑’을 키운다.

 

낙풍루 반대쪽 서문 앞에서 다시 성곽으로 올라간다. 이곳은 낙안읍성 전경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이다. 곳곳에서 휴대폰 사진을 찍느라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녹음이 짙은 나무 사이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정말 조선시대로 온 느낌이다.

 

한 집에서는 중년 부부가 평상에 앉아 가야금을 뜯고 있다. 다른 여성이 그 앞에서 무표정하게 둘을 쳐다본다. 아마 가야금 체험을 진행하는 강사인 모양이다. 낙안읍성에서는 가야금 외에 대장간, 서각, 자연 염색, 대금 등을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다. 물론 코로나19 때문에 미리 잘 알아보고 가야 한다.

 

 

 

■이순신 장군 살린 은행나무

 

낙안읍성에는 마을의 연륜만큼 오래된 나무들이 여러 그루 있다. 그중 마을 한가운데 서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특히 눈에 띈다. 높이 28m, 둘레 10m로 낙안읍성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나무다. 인조 4년(1626년) 임경업 장군이 토성을 석성으로 중수할 때 심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따지면 400년이 다 돼 간다. 일부에서는 그 이전이라고 주장한다.

 

은행나무 모양은 매우 독특하다. 나무 위쪽에만 잎이 무성한 게 아니다. 뿌리 부분에서부터 끝까지 푸른 잎으로 뒤덮여 있다. 무성한 나뭇잎 때문에 굵은 나무줄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온몸에 털이 난 거대한 곰이 우뚝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낙안읍성은 전체 모양이 배를 닮았다. 풍수지리에서는 ‘행주형’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샘을 깊이 파지 않았다. 배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키는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은행나무는 배의 돛대에 해당한다. 은행나무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전설이 전한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했지만, 병사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곳곳에서 의병을 모았다. 마침 낙안에 지원자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신 장군은 직접 낙안으로 달려갔다. 지원자는 구름처럼 몰렸다. 군에 입대하지 못한 주민들은 군량미를 대거나, 무기를 만들 수 있게 농기구를 제공했다. 이순신 장군이 의병과 군량미를 수레에 싣고 가던 도중 은행나무 아래에서 수레바퀴가 빠져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일행은 잠시 멈춰 수레를 고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낙안에서 순천으로 가는 길에는 강이 있고 그 위로 다리가 있었다. 이순신 장군 일행이 가보니, 다리는 무너져 있었다. 주변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우지끈 소리를 내며 갑자기 무너졌다고 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수레바퀴가 빠지지 않았다면, 무너지는 다리에서 꼼짝없이 죽을 뻔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은행나무의 신령이 이순신 장군의 목숨을 살렸다고 믿었다.’

 

은행나무 주변 초가집을 돌아본다. 집들 사이로 오래된 돌담이 숨어 있다. 돌담은 낯선 여행객의 시선이 부끄러운 듯 담쟁이 넝쿨과 잎 안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한 초가집에는 다양한 도자기 작품이 놓여 있다. 도자기 체험도 하고, 제품도 구매할 수 있는 곳이다.

 

시원한 바람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다시 낙풍루로 돌아왔다. 바람도 우리를 따라다녔는지 곁에서 환히 웃으며 땀을 흘린다. 안내소를 지나 자동차로 돌아가려는데 안내판 하나가 보인다. ‘낙안팔경’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금전산 금강암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백이산에서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 오봉산 위에 떠 오르는 밝고 둥근 달, 재석산 허리에 피어오르는 아침 안개, 옥산에서 나는 곧은 대나무, 선수 앞바다의 돛단배, 용소의 맑은 물과 깨끗한 돌멩이, 안동의 꽃과 버들.’

 

읽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지고 눈이 맑아지고 가슴이 깔끔해지는 풍경이다. 다음에는 낙안팔경을 미리 알아보고 한번 둘러봐야겠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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