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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조선시대 핫 플레이스, 강원의 명소는 지금]김시습 머물며 한 삭이고 문인들 발길 끊이지 않던 곳

(3) 화천군 사창리

 

 

매월당 터 잡은 '오세동자터' 남아 있어…1823년 정약용도 찾아
김수증 1670년 곡운에 들어와 일곱 칸 집 짓고 '곡운정사'라 명명
위아래 물굽이에 방화계·청옥협 등 이름 붙이고 '곡운구곡' 칭해
겸재 정선 곡운구곡 중 '첩석대'·월굴암 위 '송풍정' 화폭에 담아


1712년 정선(鄭敾·1676~1759년)은 김화 현감으로 있던 친구 이병연(李秉淵·1671~1751년)의 초대로 금강산을 유람했다. 내금강과 외금강을 화폭에 담고, 이병연의 시와 스승 김창흡(金昌翕·1653~1722년)의 시를 더해 '해악전신첩'을 만들었다. 금강산만 그린 것은 아니었다. 금강산 가는 도중에 빼어난 경관을 직접 찾아가 진경을 확인했다. 철원 지역의 화적연, 삼부연에 먼저 들렀다. 김화에서 청군과 전쟁을 하여 승리한 곳에서 '화강백전(花江栢田)'을, 김화현에 숙박하며 '화강현재(花江縣齋)'를 남겼다. 인근에 있는 수태사와 정자연도 빠트릴 수 없었다.

도마치고개를 넘었다. 포천군 이동과 화천군 사창리를 잇는 고개는 조선시대 중요한 문화 루트였다.

일찍이 김시습은 이곳을 통해 사창리로 들어와 한을 삭였다. '오세동자터'는 지금도 사창리에 남아있다. 이후 송시열과 막역한 김수증(金壽增·1624~1701년)이 터를 잡고, 조카인 김창흡마저 집을 옮기면서 노론계 문인들이 성지 순례하듯이 사창리 일대를 찾았다. 수많은 시와 여행기가 창작됐다. 정약용도 이후 1823년에 찾을 정도였다.

김수증은 1670년에 곡운에 들어와 집을 짓기 시작했다. 몇 년 걸려 일곱 칸의 집을 짓고 곡운정사라 편액을 걸었다. 곡운정사 위아래 물굽이에 방화계, 청옥협, 신녀협, 백운담, 명옥뢰, 와룡담, 명월계, 융의연, 첩석대라 이름 붙이고 곡운구곡이라 칭했다. 1682년에 궁중 화가 조세걸에게 농수정과 곡운구곡의 실경을 사실적으로 열 폭 비단 위에 그리게 했다. 정선은 곡운구곡 중 9곡인 '첩석대(疊石臺)'를 그렸다. “곡운구곡은 첩석대를 근원으로 삼는다. 물소리는 쟁글쟁글하고, 돌은 옥을 겹친 것 같다. 방화계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십여 리인데, 선생의 발걸음이 피로한 적이 없었다.” 김창흡은 그림 옆에 자신의 평을 기록했다.

곡운정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만, 중요한 것을 하나를 꼽으라면 농수정이 아닐까. 남쪽 물가의 소나무 숲이 푸르고 울창한 곳에, 최치원의 시어 '농수(籠水)'를 취하여 물로 세상의 시비가 이르지 못하도록 에워쌌다. 정선은 '곡운농수정(谷雲籠水亭)'이란 화제로 김수증의 의도를 고려해 묘사했다. 김창흡은 “시끄러움으로 시끄러움을 보내려고 했으니 각각 묘한 이치가 있다”고 그림에 적어 놓았다.

1689년에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왕이 후궁인 숙원 장씨의 소생을 세자로 삼으려 하는 것에 반대한 서인들이 내침을 당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동생 김수항은 유배지에서 사사되고, 김수증은 벼슬을 버리고 다시 곡운으로 돌아왔다. 곡운정사를 떠나 더 깊은 화음동으로 이주했다. 화음동에 삼일정을 세우고 문인석을 그렸다. 월굴암과 천근석에 글자를 새겼다. 월굴암 위에 송풍정(松風亭)을 지었다. 정선은 김수증의 심경을 생각하며 '송풍정'을 그렸다. “장쾌하구나! 허공에 지어서 함께 완상할 것이 없구나! 이곳은 곡운 선생님이 기뻐하기도 하고 분개하기도 한 곳이지만, 영리하지 못한 나는 늘 한을 품었다. 지금부터 날마다 마루를 쓸고 닦으면, 티끌을 딛고 내려준 가르침을 잇게 될 것이다.” 김창흡의 그림 평이다.

멀지 않은 곳에 일곱 신선이 산다는 칠선동(七仙洞)은 곡운구곡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김수증은 '온자(蘊藉)'로 묘사했다. 넓고 온화함, 너그럽고 따스함, 온화하며 고상한 미학을 보여준다. 정선의 그림은 전해지지 않지만 부드러움과 따스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여행객들은 신선이 돼 탈속(脫俗)의 경지를 노래했다.

설악산 영시암에 머무르던 김창흡이 큰아버지가 계시던 사창리로 향했다. 숙종 41년인 1715년 가을, 삼일리 화음동정사 바로 아래에 곡구정사가 완성됐다. 이때 김창흡의 나이는 63세였다. 곡구정사는 박후실과 유구당, 그리고 고명루로 단출하게 지어졌다. 문을 나서 동쪽으로 수십 걸음 하면 바위와 물이 반긴다. 물은 화음동에서 흘러와 큰 바위 앞에서 하얗게 부서진다. 서실을 마련하고 찾아온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곡운정사와 화음동정사, 그 사이에 있는 곡운구곡은 세상에 알려졌다. 곡구정사와 광덕계곡으로 이름이 바뀐 칠선동은 아직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불우(不遇)한 시절을 언제 끝낼 것인가.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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