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안도현, 그가 전북에서의 40년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 경북 예천으로 갔다.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만, 이별 앞에 먹먹해지지 않을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안 시인을 아끼고 따랐던 사람들이 지난 20일 저녁 전주 홍도주막에서 ‘안도현 시인 환송회 -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를 열고,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전북작가회의 회원들, 원광문학회 회원들, 동시창작모임 ‘동시랑’ 회원들, 시 읽기 모임 ‘그리운 여우’ 회원들, 이리중학교 제자들, 우석대학교 동료…. 120여 명이 환송회에 참석했고, 원광문학회 박태건 시인이 사회를 맡았다.
“경상도니 전라도니 / 이런 말의 쓰잘데없음을 / 일찌감치 깨친 / 시인이 있다. (중략) 우리는 형의 회귀가 / 더 큰 세상 속으로의 / 씩씩한 귀향임을 눈치 챈다 / 그러니 오늘 우리는 / 형을 보내며, 나를 보내는 / 것 같이 하나도 슬프지 않다 / 다만 골똘해지는 우리들 / 오래 익힌 눈망울만이 / 이 밤 가기 전 어서 술 한 잔 / 하라며 말없이 서로의 얼굴 보고 / 또 보고 잡은 손 끝내 놓지 못한다.” - 유강희 ‘안도현 형을 보내며’ 중.
이날 환송회는 먼저 유강희 시인의 시낭송으로 시작됐다. 유강희 시인의 목소리는 중간 중간 울컥 떨림이 있었지만, “울지 마”를 외치는 몇몇 문인의 응원에 시낭송은 무사히(?) 마무리됐다.
이어 김종필 전 전북작가회의 회장은 안 시인에게 ‘제2회 참고운상’을 전달했다. 김종필 전 회장은 참고운상의 의미를 밝히고 “김병용 소설가가 열 달가량 안 자고 준비했다고 해요”라며 참고운상 상패에 새긴 글귀를 읽었다.
“가야 할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하고, 써야 할 글 앞에선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고 일러주기 위해 우리 앞에 나타난 것만 같은 사람. 맹렬하면서 차가운 가슴 따뜻하면서 준엄한 문장, 함께 했던 시간은 우리의 자랑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형이며 오빠 같았던 사람, 시인인 것을 시를 통해 확인하는 사람, 책을 읽다가 책을 쓰다가 마침내 책이 된 사람, 우리들의 교과서, 안도현. 우리 삶의 모든 갈피에 당신의 이름을 적어둡니다.”
특히 이날 환송회에는 코로나19 비상상황에 따른 바쁜 일정이었던 송하진 전북지사가 깜짝 방문했다.
송하진 지사는 “코로나19가 굉장히 심각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비상으로 대기하고 있는 상태”라며 “안도현 시인은 40년 세월을 전북에서 지내며, 문학 인생 거의를 이곳에서 이뤄냈다. 매우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한다”며 감사패를 전달했다. 감사패에는 ‘이 땅이 먼저 기억하는 시인’, 안도현의 시 ‘그대에게 가도 싶다’ 중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가 새겨졌다.
또 송하진 지사는 “붓글씨 하나를 썼다. 당나라 시인의 시 ‘누실명(陋室銘)’에 나오는 대목 중 ‘어찌 누추함이 있겠느냐’라는 ‘하누지유(何陋之有)’다”며 “안도현 시인이 고향 경북과 또 다른 고향 전북을 이어주는 묵묵한 다리가 되어주기를 기원한다”고 밝히고, 코로나19 비상체제를 점검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이밖에 동시랑 회원들의 ‘안도현동시랑’ 6행시 낭독, 시 읽기 모임 ‘그리운 여우’의 시낭송, 정동철 시인의 판소리 한 대목, 참석자들의 ‘임을 위한 행진곡’ 합창 등이 이어졌다.
답사에 나선 안 시인은 “후배들이 막걸리 한잔 하고 가자고 해서 이런 자리 만들게 됐다. 감사하다”며 “소설가 장정일을 발굴해낸 박기영 시인이 있다. 스무살 때 전라북도로 간다고 하니, 반드시 이병천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병천 형을 만나며 40년이 지났다. 살아온 40년을 짧은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여기서 학교 다니고, 밥 먹고, 술 마시고, 시인도 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둘이나 갖고 할아버지도 됐다. 많은 책을 냈고, 시인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인생이 저한테 준 모든 것을 40년 동안 전북에서 받았다. 여러분이 질투심이 생기도록 더 좋은 글을 써서 인사하고 보답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앞서 안 시인은 고향 경북 예천에서 열린 인문캠프에 참석해 “현직에서 일 할 나이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자 귀향하기로 했다. 잡지를 만들고 시 읽는 모임도 꾸릴 계획이다”고 밝힌 바 있다.
이날 환송회 자리에서는 안도현 시인이 외할아버지가 됐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아이의 태명은 ‘대박’이라고.
안 시인은 아마도 ‘준치가시’처럼 많은 정을 마음에 꽂았을 환송회를 마지막으로 전북 사람들에게 이별을 고했고, 지난 22일 경남 예천에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했다.

● 안도현 시인은 - 연탄처럼 연어처럼, 문인의 길… 백석 시인 아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너에게 묻는다’ 전문.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 생각하면 / 삶이란 /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 ‘연탄 한 장’ 중.
안도현 시인은 ‘연탄재’와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백석 시를 베끼기 위해 시를 써왔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백석 시인(1912 ~ 1996)을 아꼈고 또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중. 1994년 펴낸 시집의 제목 <외롭고 높고 쓸쓸한>은 백석 시인에게서 온 것이고, 안 시인이 전교조 해직교사 시절에 쓴 시 ‘너에게 묻는다’와 ‘연탄 한 장’도 이 시집에 실려있다.
1961년 경북 예천 호명면에서 태어난 안 시인은 대구 대건고를 졸업하고, 1980년 원광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최정주·권강주·정영길와 함께‘원광문학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당선됐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돼 시인으로 등단했다.
익산 이리중학교 국어교사로 교직생활을 시작했지만,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당했다. 이후 1994년 2월까지 전교조에서 일하면서 ‘교육문예창작회’ 활동을 했다. 1994년 3월에 장수 산서고 교사로 복직돼 일하다가 1997년 교사직을 내려놨다. 이후 전업작가 생활을 했으며,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외에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등 시집, 10여 개국 언어로 번연된 동화 <연어>,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기러기는 차갑다>,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백석평전> 등을 출간했다.
윤동주문학상, 백석문학상, 이수문학상, 노작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상, 시와시학상 젊은 시인상 등을 받았다.
최명희문학관 최기우 관장은 “안도현 시인은 군산항·모항·산서고등학교·춘향터널·화암사 등 전라북도 14개 시·군의 풍경과 감성을 빠짐없이 시에 담으며 전북 문단사에 뚜렷하게 이름을 새겼다”며 “시인과 함께 살아온 세월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 땅 사람들은 오래도록 가슴이 벅찰 것이다”고 말했다.
이용수 기자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너에게 묻는다’ 전문.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 생각하면 / 삶이란 /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 ‘연탄 한 장’ 중.
안도현 시인은 ‘연탄재’와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백석 시를 베끼기 위해 시를 써왔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백석 시인(1912 ~ 1996)을 아꼈고 또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중. 1994년 펴낸 시집의 제목 <외롭고 높고 쓸쓸한>은 백석 시인에게서 온 것이고, 안 시인이 전교조 해직교사 시절에 쓴 시 ‘너에게 묻는다’와 ‘연탄 한 장’도 이 시집에 실려있다.
1961년 경북 예천 호명면에서 태어난 안 시인은 대구 대건고를 졸업하고, 1980년 원광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최정주·권강주·정영길와 함께‘원광문학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당선됐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돼 시인으로 등단했다.
익산 이리중학교 국어교사로 교직생활을 시작했지만,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당했다. 이후 1994년 2월까지 전교조에서 일하면서 ‘교육문예창작회’ 활동을 했다. 1994년 3월에 장수 산서고 교사로 복직돼 일하다가 1997년 교사직을 내려놨다. 이후 전업작가 생활을 했으며,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외에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등 시집, 10여 개국 언어로 번연된 동화 <연어>,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기러기는 차갑다>,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백석평전> 등을 출간했다.
윤동주문학상, 백석문학상, 이수문학상, 노작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상, 시와시학상 젊은 시인상 등을 받았다.
최명희문학관 최기우 관장은 “안도현 시인은 군산항·모항·산서고등학교·춘향터널·화암사 등 전라북도 14개 시·군의 풍경과 감성을 빠짐없이 시에 담으며 전북 문단사에 뚜렷하게 이름을 새겼다”며 “시인과 함께 살아온 세월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 땅 사람들은 오래도록 가슴이 벅찰 것이다”고 말했다.
이용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