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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선감학원, 악몽을 살다] 삶을 파괴당한 아버지 '그의 마지막 외침'

선감학원 피해자 故 이대준씨 이야기

아들은 아버지가 늘 가엾고 안쓰러웠다. 뒤엉켜버린 삶의 실타래를 끝끝내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였다. 행복보다 불행, 기쁨보다 슬픔이란 단어와 더 가까운 존재였다. 아들의 눈에 비친 고(故) 이대준씨는 한평생을 벼랑 끝에 서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살았다. 선감학원은 대준씨의 일생을 지독하리만큼 꼬이게 만든, 그를 죽음의 문턱으로 내몬 비극의 시작점이었다.

 

1958년생인 대준씨는 아홉 살 나이에 길거리에서 걸식을 한다는 이유로 단속반에 검거돼 선감학원으로 끌려갔다. 가족이 있는 아이들도 무작위 수집돼 선감도에 격리되는 판국에, 부모가 없던 대준씨는 단속반의 실적을 채울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러나 대준씨는 선감도로 보내지기 전까지 수원시의 한 고아원에서 무탈히 생활하고 있었다. 부랑아가 아니었던 것이다.

 

 

 

수원 한 고아원에서 무탈히 생활하던 아버지
걸식한다는 이유로 검거돼 선감학원 끌려가
노역 시달리고 굶주리고… 매 맞고 기합받고
친구와 목숨 걸고 탈출한 끝에 섬에서 벗어나
 
진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바깥에서 부랑아로 살았든, 그렇지 않았든 선감도에 수용된 원아들은 모두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대준씨도 노역에 시달리고, 굶주렸다. 때가 되면 매를 맞고 기합을 받았다. 대준씨는 그렇게 10년가량을 선감도에서 보냈다. 친구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탈출한 끝에 지옥 같던 섬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40여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당시의 고통스런 경험을 생생하게 증언해 줄 대준씨는 이 세상에 없다. 간암 투병을 하던 그는 지난 2020년 61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인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조차 받지 못한 채 숨졌다. 눈을 감던 그날까지 대준씨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응어리는 풀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2020년 61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눈 감던 그날까지 풀지 못 한 '가슴속의 응어리'
반찬 투정을 하면 들었던 선감도에서의 이야기
친구 같았던 아버지, 그의 삶에 애통함을 느낀다
아들 현진(35)씨는 그런 아버지의 삶에서 애통함을 느낀다. 그에게 대준씨는 친구 같은 아버지였다. 서로 장난도 치고 별거 아닌 일로 다투기도 하는 평범한 부자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농담처럼 선감학원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제가 어렸을 때 반찬 투정을 하면 아빠는 선감도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지금 살고 있는 환경에 감사해야 한다고 농담처럼요. 자신이 고아였고, 선감도에서 도망친 이야기를 아빠가 했던 기억이 나요."

현진씨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고통스런 경험을 상세하게 알게 됐다. 아버지의 왼쪽 허벅지에 난 흉터가 곡괭이로 매를 맞다 날에 찔려 생겼다는 사실도, 아버지의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습관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선감학원에서는 밥 먹을 시간을 안 줬대요.

 
선착순 안에 들지 못하면 그날은 하루 종일 굶는 거라고, 주머니에 생쌀을 숨겨놓고 나중에 몰래 먹은 굶주린 기억을 많이 이야기 해주셨어요.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식사를 굉장히 빨리 했어요. 자장면 먹는 데 1분도 채 안 걸려요. 집에선 항상 모든 반찬을 밥에 넣고 비벼드셨어요. 급하게 먹으면 몸에 좋지 않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해도 밥먹는 속도만큼은 안 변하더라고요."

30대 초반이던 대준씨는 간경화를 앓아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간이 좋지 않았다. 아들의 눈에 아버지는 언제나 피곤해 보였다. 그래도 대준씨는 쉴 수 없었다. 그가 일을 멈추면 아들과 딸, 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막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현진씨 기억에 아버지는 평일·주말 구분 없이 돈을 벌러 나갔다. 대준씨는 2017년 간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역시나 일은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병세가 악화돼 사망하기 일주일 전까지 인천시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일했다.

대준씨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선감학원의 참혹한 진상을 알리는 일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는 암판정을 받은 그해 선감학원 아동피해대책협의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선감도에서 벌어진 국가폭력의 민낯을 고발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는 자신의 치부를 자식에게 드러내는 것조차 꺼리지 않았다. 대준씨의 결의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굶주린 기억을 많이 이야기해 주셨던 아버지
주머니에 생쌀 숨겨놓고 몰래 먹었다던 말씀
그 때문인지 항상 식사를 굉장히 빨리하셨다

간암 진단받고 생과 사의 갈림길 놓였었지만
참혹했던 그날의 진실 알리는 일 포기 못했다

 

 

선감학원 피해 사례가 공론화되던 시점에

 

아빠가 저한테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성인이 됐으니 저도 알아야 되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말씀해 주신 것 같아요. 선감학원에 계실 때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였어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군대보다 더한 곳에 끌고 가 밥도 안 먹이고, 옷도 입히지 않고, 잠도 못자게 한 국가에 화가 나더라고요."

이후 아버지와 함께 선감도를 찾는 일이 잦아졌다. 가족여행을 가는 대신 시간이 나면 선감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현진씨도 아버지와의 동행이 싫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아빠가 선감학원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선감도에 자주 모셔다 드렸어요. 쉬는 날에 어디가고 싶냐고 물어보면 꼭 선감도에 가고 싶다고 하셨어요. 원생 다수가 헤엄쳐 탈출하다 죽은 곳이 어딘지, 선감도로 들어가는 배를 탔던 선착장이 어디였는지 그때 알게 됐죠."
어린 아이를 군대보다 더한 곳에 끌고 가
밥도, 옷도, 잠도 못해준 국가에 화가 난다
아버지 제대로 된 행복 한 번 누리지 못해
삶이 너무 불행하게 흘러갔다는 생각 들어
대준씨가 가진 열정과는 반대로 그의 몸은 점점 병들어 갔다. 현진씨는 생전에 아버지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아침에 일을 나갔다가 돌아온 아버지는 주로 TV를 보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술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변변한 취미 하나 없었다. 대준씨는 그런 아버지가 가여웠다.

"아빠의 삶 자체가 슬픈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대로 된 행복, 빛 한 번 보지 못한 채 살아오셨거든요. 어렸을 땐 부모가 없었고, 세상이 뭔지도 모르던 나이에 선감학원에 끌려갔죠. 그곳을 탈출한 뒤엔 배운 게 없으니 몸이 고생을 했고요. 원했던 삶, 일반적인 삶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암이라는 사망 선고를 받은 아빠의 삶이 너무 불행하게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어 안쓰러워요."

 

 

아버지가 선감학원에 끌려가지 않았다면,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기술을 익혀 삶을 살았다면. 그랬다면 아버지가 병들어 돌아가시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요즘 현진씨는 아버지의 정반대 삶을 그려본다.

"선감학원에서 탈출한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제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아버지가 살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삶을 살아보라고요."
아버지가 생전에 자필로 남긴 글 '아픈 기억'
억울하게 죽어간 소년들에 진심으로 사죄하길
언제까지 말만 하고들… 인생 얼마 남지 않아
선감학원 피해자 대준씨는 2020년 1월15일 고인이 됐다. 그는 병상에 누워서도 선감학원 일을 처리하고자 매일 수십통의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가 생전 자필로 남긴 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선감학원 생존자들의 아픈 기억'의 일부를 남긴다.

"선감학원에서 지내다 세상 밖으로 나온 소년들은 숨어 살며 선감도에서 고통받던 기억들을 잊으려고 마셔보지도 못한 술을 조금씩 마시다 술 중독이 되어 한명 한명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지금이라도 국가와 경기도는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들이나 억울하게 죽어간 소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길 바랍니다. 많은 피해 생존자들은 나이도 많이 들었고, 병에 걸려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과거사 과거사 말만 하고들 계십니까. 인생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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