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림강릉 1.3℃
  • 서울 3.2℃
  • 인천 2.1℃
  • 흐림원주 3.7℃
  • 흐림수원 3.7℃
  • 청주 3.0℃
  • 대전 3.3℃
  • 포항 7.8℃
  • 대구 6.8℃
  • 전주 6.9℃
  • 울산 6.6℃
  • 창원 7.8℃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순천 6.7℃
  • 홍성(예) 3.6℃
  • 흐림제주 10.7℃
  • 흐림김해시 7.1℃
  • 흐림구미 5.8℃
기상청 제공
메뉴

(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사랑에 실패한 왕자, 곰 석상이 되다

[유럽 인문학 기행-폴란드] 바르샤바 구시가지 예수회 교회

옛날 폴란드 바르샤바에 왕자가 살았다. 그는 매우 용감한데다 싸움도 잘해서 전쟁에 나갈 때마다 적군을 통쾌하게 무찌르고 조국에 완벽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게다가 아주 친절해서 백성들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야! 곰 왕자님이 지나가신다.”

“왕자님, 안녕하세요. 여전히 씩씩하시네요.”

 

왕자의 팔뚝은 엄청나게 굵었고, 키도 무척 컸다. 그는 여기에 더해 힘이 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곰 왕자’라고 불렀다.

 

 

왕자는 별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단점 때문이었다. 그는 추남이었다. 그냥 못생긴 정도가 아니라 얼굴을 2~3초만 바라보아도 괜히 기분이 나빠질 정도였다. 얼굴은 고슴도치 굴이 덮인 것처럼 울퉁불퉁했고, 피부색은 시커멓다고 할 정도로 짙었다. 검은색 머리숱은 도저히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왕자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곰 왕자’라고 부르는 것은 용감하기 때문이지만, 못생겼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라는 사실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그를 무척 좋아했다. 바르샤바의 소녀들도 그를 정말 사랑했다. 하지만 그를 남성으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아끼고 평화롭게 살도록 해주는 지도자로서 사랑했을 뿐이었다. 부모들은 못 생긴 왕자에게 딸을 시집보내려 하지 않았고, 소녀들도 왕자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왕자는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가 나쁜 성품의 소유자였다면 백성들의 이중성에 화가 나 폭정을 일삼거나, 강제로 예쁜 소녀들을 침대로 끌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어질었던 왕자는 도무지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왕자는 언제나 외로웠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슬퍼하고 있었다. 세상 어딘가에는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만 보고 나를 사랑해 줄 소녀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왕자는 어느 날 구시가지(스타레 미아스토)의 예수회 교회(코스치올 제주이토브)에 예배를 드리러 갔다.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성모마리아 교회’라고 부르던 곳이었다. 그는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리면서 외로운 마음을 잊었다.

기도를 드리고 돌아 나오던 왕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뒷좌석에 그를 기절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소녀가 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은 천사처럼 하얗고 단정했고, 머리카락은 금발로 반짝였다. 푸른 눈빛은 발트 해의 바닷물처럼 싱그러웠고, 입술은 빨간 사과를 축소시켜 놓은 것처럼 달콤해 보였다.

왕자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라고 감격했던지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이나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기도에 너무 열중하고 있어 왕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왕자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이후 매일 예수회 교회에 갔다. 소녀를 처음 본 그 자리에 늘 앉았다. 그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척했지만, 실제 마음은 뒷자리에 앉은 소녀에게 가 있었다. 그는 소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네 자신을 생각해 봐. 너라면 이렇게 험상궂은 남자가 말을 거는 게 좋겠니? 소녀가 마음을 정해서 먼저 말을 걸 때까지 기다려.’

 

 

왕자는 하루 종일 소녀 생각만 했다. 밥을 먹을 때에도, 화장실에 갈 때도, 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전장에 나가서 적을 상대로 칼을 휘두를 때도 그랬다.

세월은 흐르고 흘렀다. 하루가 지나가고, 한 달이 지나가고, 여섯 달이 지나갔다. 왕자는 마침내 결심했다.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소녀에게 전할 말을 글로 적어 전날 밤 왕궁에서 남몰래 수십 차례나 연습했다.

“아름다운 소녀여! 두려워하지 마시오. 얼굴은 이렇게 험악하게 생겼지만 마음은 천사처럼 고운 사람이라오.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지고 말았소. 나의 마음을 받아주시오. 평생 나의 동반자가 되어 주길 바라오.”

왕자는 다음 날 아침 아무도 모르게 왕궁 정원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장미 100송이를 꺾어 다발로 묶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가장 멋진 옷을 골라 입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예수회 교회로 걸어갔다.

그날따라 교회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모두 깨끗한 옷을 입고 있기도 했다. 왕자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는 사실이 소문나는 바람에 사람들이 축하해 주려고 이렇게 모였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왕자는 자신을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사람들을 헤집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뿔싸!

이날 교회에서는 왕자가 사랑을 고백하기로 한 소녀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소녀는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곁에는 키가 크고 잘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교회의 신부는 그들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있었다.

왕자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수많은 전쟁에 나가 막강한 적들을 맞이했을 때도 떨리지 않던 가슴이 쿵쾅거렸다. 적군이 몰고 온 코끼리 부대에 맞서서도 흔들리지 않던 두 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장미 다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넓은 교회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오직 왕자뿐이었다.

왕자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예수회 교회 정문 한쪽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소녀는 결혼식을 마친 뒤 마차를 타고 새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하객들은 모두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다.

서서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왕자는 얼굴을 가린 채 그대로 계속 앉아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밤이 깊었다. 그래도 왕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저게 뭐지? 어제는 저게 없었잖아? 도대체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일까?”

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예수회 교회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교회 정문 옆에 이상한 조각상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없던 것이었다. 바로 곰 석상이었다. 곰은 아주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도 누가 곰 석상을 만들었는지, 왜 교회 정문 옆에 가져다 놓았는지 알지 못했다.

같은 시간 왕궁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무런 기별도 없이 왕자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전장에 나간 것도 아니고, 여행을 떠난 것도 아니고, 사냥을 하러 간 것도 아니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세월은 흐르고 흘렀다. 바르샤바를 관통하는 비스와 강의 강물이 적어도 1만 번은 바다로 갔다가 다시 구름이 되어 비스와 강에 떨어져 강물이 될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바르샤바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한 전설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예수회 교회 앞에 있는 곰 석상은 짝사랑에 실패한 곰 왕자가 돌로 변한 것이래요. 그는 지금도 돌 속에 갇혀 괴로워하고 있답니다. 곰 왕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소녀가 곰 석상에 사랑의 키스를 하면 곰 왕자는 다시 사람으로 환생한대요.”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많이 본 기사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