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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3)] K-웹툰 뿌리 간직한 '부천 한국만화박물관'

권력 비웃던 '풍자의 미학'… 불량낙인 지우고 황금알 품었다

 

당신의 인생 만화는 무엇인가요?

 

세대가 다르고 성별이 달라도 누구에게나 인생 만화 하나쯤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볼거리, 즐길거리가 차고 넘치는 요즘에도 글과 그림이라는 단순하고 원초적인 형태의 기록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만화는 강한 흡입력과 호소력으로 사람들을 매료한다. 

 

한국 최초의 만화로 인정받는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 1면에 게재된 이도영 화백의 삽화로부터 전 세계 콘텐츠 기획자들이 주목하는 웹툰까지 100년이 넘은 한국 만화 역사에 수 많은 만화가 등장해 대중들과 함께 웃고 울었다.

 

문화콘텐츠 가운데 만화만큼은 세계 4대 강국으로 꼽히는 한국, 세계 최초로 웹툰형식을 개발해 전 세계의 이야기꾼으로 떠오른 한국. 한국인의 DNA 속에 담긴 만화 사랑을 쫓아본다. 

 

1909년 이도영 화백 '대한민보 삽화' 최초 만화로 인정
해방후 김용환 '토끼와 원숭이' 당시 사회 혼란상 반영
이산 위로한 김종래 '엄마찾아 삼만리' 첫 베스트셀러
한 때 '사회악' 취급·시사만화 검열 등 입지 타격에도
디지털·웹툰 시대 열리며 세계적 인기… 전성기 맞아

 

 

만화도 문화재가 될 수 있나요

 

만화는 한때 유해하다거나 다소 낮은 수준의 문화콘텐츠로 인식된 바 있다. 그러나 한국 만화의 출발점을 보면 비유와 상징으로 사회상을 고발하고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위로를 건네는 작품들이 많다. 특히 한국 만화사를 보면 해방 이후 예술·문학 등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다.

 

 

▲ 토끼와 원숭이

한국 최초의 만화책 단행본으로, 우리나라 현대만화의 개척자인 김용환 화백의 작품이다. 1946년 일제강점기 말기와 해방 이후의 정치사를 한국을 토끼로, 일본을 원숭이로 빗대어 풍자했다.

평화롭게 지내던 토끼 나라를 원숭이 나라의 군대가 무력으로 점령해 토끼들을 탄압하고 원숭이처럼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또 원숭이가 뚱쇠나라(중국)을 침략, 뚱쇠나라가 여우와 호랑이(강대국)에 구조신호를 보내지만, 센이리(미국)가 싸움에 끼어 원숭이의 항복을 얻어내는 내용이 줄기를 이루고 있다.

또 토끼의 정체성을 잃은 원숭이 모습의 토끼들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되돌리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에서 혼란하던 사회상을 유추할 수 있다.

귀여운 동물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하얀 토끼와 까만 원숭이의 흑백 대치로 일제의 부당한 침략행위와 식민통치를 고발하고 있다. 비유와 상징으로 사회상을 풀어내면서 현존하는 최고의 만화책 단행본으로의 가치뿐 아니라, 풍자의 미학이 담긴 작품이라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동화작가 마해송이 1931년 '어린이' 7호에 연재한 동화 원작을 바탕으로 김용환 화백이 그림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만화에서 사용하는 말풍선 없이 글과 그림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2013년 만화로는 최초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 엄마찾아 삼만리

김종래 화백이 1958년 내놓은 우리나라 최초의 베스트셀러 만화다.

작품은 이탈리아의 단편 동화 '아페니니 산맥에서 안데스 산맥까지'에서 마르코가 아르헨티나에서 일하는 엄마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었지만, 한국적인 소재와 배경으로 인기를 얻었다.

한 가족의 비극에서 시작되지만 양반들의 민중에 대한 수탈과 탐관오리들의 횡포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구조적 모순을 비판했다.

한 가족의 비극에서 시작되지만 수탈당하는 양반, 탐관오리의 횡포와 수탈당하는 민중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이 한국전쟁 이후 많은 이산가족, 시대의 아픔을 겪는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큰 호응을 얻어 1980년대까지도 엄마찾아 삼만리의 출판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김종래 화백의 아름다운 그림이 작품을 더욱 빛내고 있다.

1958년 초판 상권이 발행된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10판의 출판까지 이어졌다. 당시 상하권 총 400여쪽에 이르고 국판 양장본이 각 권 300환에 달하는 고가였음에도 1만5천여부가 팔려나갔다고 알려졌다.

 

 

▲ 코주부 삼국지

1953~1955년 김용환 화백의 작품으로 201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코주부 삼국지는 당시 만화가 에피소드형이 대부분이었는데, 장편 서사물로 연재돼 큰 인기를 끌었다. 또 글과 그림이 분리된 '그림 이야기책' 형식이었던 만화가 본격적으로 말풍선을 사용하는 형식적으로 진보를 보여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한국 만화사에 큰 획을 그었다.

또 '코주부'라는 캐릭터를 창안해 코주부 삼국지뿐 아니라 다른 만화에도 활용했다는 점에서 이후 활동한 작가들에 영감을 줬다.

잡지에 만화를 연재한 뒤 다시 단행본으로 출간한 방식도 만화 출판 형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종이가 부족해 조잡한 질로 인쇄되던 다른 만화와 달리 고급종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김용환 화백도 깊은 애정을 가진 작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덕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역시 컬러표지에서부터 흑백 본문까지 분량 전체가 큰 훼손없이 완벽하게 보존돼있다.

'불량'의 오명을 쓴 한국만화 황금알을 낳다.

한국 만화는 1909년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 삽화로 시작했다는 것이 만화계에서 통용되는 정론이다. 대한민보는 일제강점기에 강제 폐간됐지만, 잡지 삽화나 포스터 등으로 이어졌다.

해방 이후 1950년대에는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의 시사만화가 시대의 화두를 던지는 역할을 했지만, 그만큼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어 1960년대 대본소(만화방)가 등장하면서 한국 만화가 급성장하는 계기가 마련됐지만, 일본만화의 해적 출판을 양상하면서 불량만화의 오명을 쓰기도 했다. 심지어 1967년에는 만화가 6대 사회악으로 꼽힐 정도로 여론이 나빠졌다.

그럼에도 신동헌 화백이 내놓은 최초의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큰 성공을 거두는 등 한국만화의 강한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1970년대, 성인만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고우영 화백의 '임꺽정' 등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1972년 당시 한 초등학생이 만화에 등장하는 환생을 믿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해 정부가 불량만화 일제단속을 실시해 만화가의 상상력과 창작의욕이 위축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전두환 정권에서 시사만화 검열로 특유의 풍자와 비판을 상실했지만 순정만화가 인기를 얻었고, 전두환 정권의 3S정책으로 이상무 화백의 독고탁이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신춘문예에 만화평론 부문이 생기고 대학교에 만화학과가 설치됐으며, 정부에서는 '만화산업육성발전방안'이 호응하기도 했지만, 일본대중문화개방으로 한 때 한국 만화가들이 타격을 입기도 했다.

2000년대는 한국의 디지털만화, 웹툰의 시대가 열리면서 본격적인 황금기를 맞이하게 됐다. 2003년 강풀의 '순정만화'가 역대급 히트를 치면서 세로 스크롤 형식의 장편웹툰이 웹툰으로 정립하기 시작해 조석의 '마음의 소리' 등이 포털에서 성공을 거뒀다.

 

 

현재까지 웹툰시장이 확장돼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제작되고 있고 드라마, 영화의 원작이 되며 미디어믹스로 활발히 진행돼 이미 웹툰시장은 1조원 시대를 돌파했다.

해외에서도 카카오웹툰과 네이버웹툰 등이 수익률 1위, 일본 앱 만화 플랫폼의 70%가 한국업체라는 사실은 한국만화가 세계만화시장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수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경영지원팀장은 "만화는 대중과의 소통"이라며 "낮게 그리고 넓게, 깊게 사람들에게 파고들면서 사랑을 받아왔다"고 설명했다. 김선미 만화영상사업실장도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소통하는 것이 만화"라며 "만화는 시대를 넘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예술에 뿌리를 둔 한국만화

(사)한국원로만화가협회 권영섭 회장은 한국 만화사의 산 증인이다. 만화를 좋아하던 소년으로 1959년 데뷔해 지금까지도 작품활동을 이어오는 그는 '데생과 드로잉'이 한국만화를 이어온 뿌리라고 강조했다.

권 회장이 데뷔하던 시절에는 만화가가 워낙 많지 않아 신문과 잡지에 원고만 보내도 수입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만화가들은 김용환 선생이 강조하던 '데생과 드로잉'을 잊지 않았다고 말한다.

 

 

권 회장은 "김용환 선생이 일본의 미술학교 출신으로, 한국에서 만화를 그리면서도 그림을 항상 강조했다"며 "그 뜻이 이어져 홍길동의 신동헌 선생이 당시 생소했던 누드크로키를 시도하는 등 회화에서 한국만화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아쉬운 점도 있다. 권 회장은 "한 때 만화가 특정업체의 독점으로 이어지면서 이미 성공한 작가들의 그림체를 답습하기도 했다"고 굴곡진 만화사를 압축했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대중문화 개방 이후 침체된 만화계에 후배들이 첨단 IT 기술을 무기로 활로를 찾은 것에 찬사를 보낸다"며 "만화를 넘어, 영화나 게임 등으로 뻗어 나가는 한국만화의 전성기를 이어가야 한다"고 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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