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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지동설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인입니다”

[유럽 인문학 기행-폴란드] 코페르니쿠스 기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그리스나 이탈리아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1800년대 초의 어느 날이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대통령궁에서 각료 회의가 열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초로의 사내가 아주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장관들에게 코페르니쿠스 이야기를 꺼냈다. 여러 곳에서 탄광을 개발한 공로로 산업부 장관 자리를 맡은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츠였다.

 

 

■폴란드의 영웅

“과거에는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교회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정부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이 그가 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금서 목록에서 해제한 것도 벌써 40년 전 일이 아닙니까?”

 

코페르니쿠스는 마리 퀴리와 함께 폴란드가 자랑하는 가장 위대한 양대 과학자였다. 그런데 폴란드로서는 불행하게도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은 두 과학자가 폴란드인이 아니라 다른 나라 출신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폴란드 국민들은 이 사실에 불만이 적지 않았다. 폴란드에서 존경받는 문인이자 경제인, 정치인이었던 스타시츠가 각료 회의에서 말을 꺼낸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스타시츠 장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코페르니쿠스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그의 고향에 그의 기념물을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기념물을…?”

“정부 예산을 투입하지 말고 국민들로부터 성금을 모으는 겁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해서 경제계의 주요 인사들은 기부금을 내고요. 유럽 여러 나라에는 코페르니쿠스 기념물을 만든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면 좋겠습니다.”

 

 

폴란드 정부는 스타시츠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스타시츠는 탄광 개발 등으로 돈을 많이 벌었지만 구두쇠라고 소문난 사람이었다. 늘 낡은 옷만 입고 다녔고, 마차도 잘 이용하지 않았다. 친구도 잘 안 사귀었다. 그러다 보니 사교모임에 참석하거나 직접 주최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재산을 국가나 사회를 위해 쾌척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코페르니쿠스 기념물 조성 모금 운동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폴란드 국민은 앞 다퉈 성금을 내놓았다. 스타시츠가 공사비 가운데 상당부분을 부담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폴란드 정부는 당초 코페르니쿠스의 고향인 폴란드 북‧중부 소도시 토룬에 기념물을 지을 생각이었다. 그곳을 찾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코페르니쿠스의 고향에 왜 그를 상징하는 기념물을 만들지 않은 것이지?”라고 놀라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폴란드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급변하는 바람에 기념물은 바르샤바에 지을 수밖에 없었다.

폴란드 정부는 1822년 코페르니쿠스 기념물 설계 국제 공모전을 실시했다. 덴마크의 조각가 파텔 토발슨이 당선돼 설계를 맡았다. 그는 네오클래식 형식을 매우 좋아했고, 그리스신화에서 작품 모티프를 많이 찾던 조각가였다. 1792년 프랑스대혁명 때 혁명군에 맞서 튈르리 궁전을 지키려다 몰살당한 스위스 용병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스위스 루체른의 ‘빈사의 사자상’도 그의 작품이었다. 바르샤바 대통령궁 앞의 주제프 포냐토프스키 동상도 그가 만들었기 때문에 폴란드 정부 및 예술계에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기념물 공사는 1828년에 시작돼 2년 뒤인 1830년에 끝났다. 코페르니쿠스 기념물은 높은 좌대 위에 놓인 큰 의자에 코페르니쿠스가 앉은 동상 형태로 만들어졌다. 동상 앞에는 청동으로 만든 태양계 모형이 설치됐다. 동상 왼쪽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심장을 모신 교회가 있다. 동상 뒤는 폴란드 과학아카데미 건물인 스타시차 궁전이다.

 

 

제막식은 폴란드 극작가 겸 정치가 줄리안 우르신 넴체비츠의 사회로 열렸다. 이날 행사에 가톨릭 성직자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교황청이 1758년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금서’에서 해제했지만 상당수 성직자는 여전히 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 동상은 하마터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없어질 뻔했다. 폴란드를 점령했던 독일군이 1944년 동상을 녹여버리려 했던 것이었다. 바르샤바 시민들이 이른바 ‘바르샤바 봉기’라는 반독일 항쟁을 벌인 데 대한 보복이었다. 독일군은 동상을 폴란드 남서부의 작은 도시 니사로 옮겼다. 하지만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진격해오는 바람에 동상에 손도 대지 못한 채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숨겨진 시신

코페르니쿠스의 원래 이름은 미콜라이 코페르닉이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독일어 이름이었다. 1473년 토룬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천문학, 수학은 물론 종교법, 경제학, 의학, 정치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배웠다. 이탈리아에서 10년 동안 공부한 그는 귀국해 바르미아 주의 프롬보르쿠로 갔다. 거기에서 정치인, 경제인으로 활동하면서 한편으로는 천문학을 계속 연구해 지동설의 기초를 닦았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다는 소식은 1533년 교황 클레멘스 7세의 귀에 들어갔다. 그의 이색 주장에 흥미를 보인 교황은 편지를 보냈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주장은 정말 기발하군. 다른 학자와도 견해를 나눠 지동설을 더 발전시키도록 하게.’

소식을 들은 유럽의 여러 학자도 그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지동설이 어떤 내용인지 알고 싶군요. 어서 책으로 발간하시기 바랍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미 이론의 토대를 완성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책 발간을 서두르지 않았다. 세상의 인심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교황은 지동설에 매우 흥미를 보이지. 하지만 다음 교황은 어떨지 아무도 몰라. 내가 지금 책을 내면 나중에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야.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지.’

로마 교황청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일찍 죽을 생각이 없었던 그는 지동설을 담은 책을 사후에 발표하기로 했다. 전설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는 죽기 직전 지동설을 담은 책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첫 인쇄본을 건네받았다. 그는 유작에 입을 맞춰 작별인사를 한 뒤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1543년 5월 24일, 그의 나이 70세였다.

코페르니쿠스가 남긴 유언은 매우 이색적이었다.

‘내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게.’

코페르니쿠스의 가족과 지인은 그가 왜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지동설이 탄압을 받는 시대가 올 것이며, 그 때에는 교황청이 그의 시신을 파내 훼손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걱정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그가 죽고 73년 후인 1616년 로마 교황청은 종교재판을 열어 기독교의 신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금서로 결정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시신이 어디에 묻혀있는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유해가 발견된 것은 500년 가까이 지난 2005년이었다. 전화 한 통이 일의 시작이었다.

바르샤바 북쪽 푸우투스크에 있는 푸우투스크 고고학 연구소의 제르지 가소브스키 소장은 2004년 프롬보르쿠 성당의 자섹 제지에르스키 주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코페르니쿠스는 우리 성당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틀림없이 성당 지하에 그의 무덤이 있고 유해가 묻혀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제발 그의 무덤과 유해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여러 차례 전화에 시달린 가소브스키는 조사단을 꾸려 프롬보르쿠 성당으로 갔다. 그는 1년 가까이 곳곳을 뒤진 끝에 성당 바닥 아래 깊숙한 곳에 숨겨진 사람 유해를 발견했다. 상태를 살펴본 결과 70대 무렵에 사망한 노인으로 추정됐다.

가소브스키는 유해를 폴란드 경찰 법의학연구소에 보냈다. 연구소는 컴퓨터를 이용해 두개골의 얼굴을 복원했다. 그 결과 코페르니쿠스가 직접 그린 자화상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 나타났다.

아래턱 등 유해 일부분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의학연구소는 유해가 코페르니쿠스라고 100%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은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에 보관된 코페르니쿠스 머리카락의 DNA 자료를 제공받았다. 그 DNA를 프롬보르쿠 성당에서 발굴한 유해에서 채취한 DNA와 비교했다. 결과는 ‘100% 일치’로 나타났다.

2010년 5월 22일 폴란드 정부는 코페르니쿠스 장례식을 새로 성대하게 거행했다. 장례 미사는 전직 폴란드 주재 교황대사였던 주제프 코발칙 폴란드 대주교가 집전했다. 유해는 다시 프롬보르쿠 성당에 묻혔다. 지금 그의 무덤 앞에는 지동설을 발견한 사람이라는 내용을 담은 검은색 화강암 묘비석이 서 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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