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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평생 한 여인만 사랑한 폴란드 국왕의 여름 별궁

[유럽 인문학 기행-폴란드] 빌라누프 궁전

 

■원하지 않은 결혼

따뜻한 봄은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들판에서는 푸른 풀이 조금씩 땅을 뚫고 나왔고, 작고 노란 꽃은 정말 봄이 온 건지 알아보려고 머리를 치켜들었다.

이날은 1658년 3월 3일이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왕궁에는 더욱 봄기운이 완연했다. 왕궁에서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신나는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날 이곳에서는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자모쉬치 지역의 지주이면서 귀족인 얀 자모이스키와 그의 부인이 될 마리시엔카였다.

“자모이스키 씨, 축하드려요. 왕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난 아가씨를 신부로 맞다니 당신처럼 행운이 넘치는 분은 없을 거예요.”

 

신랑은 기분이 좋은지 계속 싱글벙글했다. 하객이 축하 인사를 건넬 때마다 환하게 웃느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서른한 살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노총각이었다. 재산은 엄청나게 많으면서도 신붓감을 못 구해 여태 결혼을 못했다.

 

신랑보다 더 즐거워야 할 신부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단순히 긴장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폴란드 사람이 아니었다. 원래 프랑스 출신이었다. 본래 이름은 마리 카시미어 루이사였다. 결혼식이 열리던 날에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다.

마리시엔카의 부모는 부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빚을 청산하기 위해 다섯 살도 안 된 어린 딸을 귀족 집에 하녀로 팔아 버렸다. 귀족 부부는 마리시엔카에게 딸 마리아 루이사의 시중을 들게 했다.

마리시엔카가 폴란드에 간 것은 마리아 루이사의 결혼 때문이었다. 그녀는 폴란드 국왕인 브와디스와프 4세와 결혼해 바르샤바로 가면서 마리시엔카도 데리고 갔다.

마리시엔카는 가자마자 왕궁에서 눈길을 끌었다. 탁월한 미모 덕분이었다. 해가 갈수록 그녀의 미모는 더 빛이 났다. 왕궁을 드나드는 많은 귀족 남성이 그녀의 미모를 칭송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신분의 한계가 있었다. ‘결혼 지참금을 챙겨줄 부모가 없는 예쁜 아이’에 불과했다.

 

마리시엔카처럼 신분은 낮지만 아름다운 시녀는 권력자가 벌이는 정치 게임에 희생물로 사용되기 일쑤였다. 마리 루이사에게 마리시엔카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마리 루이사는 마리시엔카를 폴란드 최고의 부자인 자모이스키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는 대저택을 150채 갖고 있으며, 마을 다섯 곳을 영지로 소유한 귀족이었다. 국정을 잘 다스리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국왕 부부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왕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때로는 왕의 정책에 노골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 마리 루이사가 마리시엔카를 그에게 보낸 것은 달래면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였다.

자모이스키는 마리시엔카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두었던 것은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돈을 아무 곳에나 펑펑 쓰는 난봉꾼이었다. 술에 취하면 폭력적으로 돌변하기 일쑤였다.

 

■사랑으로 이룬 결혼

“얀 소비에스키 장군은 미친 것 아냐? 재력이나 능력을 보면 얼마든지 훌륭한 귀족 가문에 사위로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왜 저런 천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지?”

1665년 7월 바르샤바 왕궁에서 다시 결혼식이 열렸다. 신랑은 폴란드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으로 평가를 받던 얀 소비에스키였다. 신부는 뜻밖에 7년 전 자모이스키와 결혼했던 마리시엔카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사실 소비에스키와 마리시엔카는 오래 전부터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다. 둘은 국왕의 승낙을 얻어 결혼할 생각이었지만 왕비가 마리시엔카를 자모이스키에게 보내는 바람에 꿈을 이루지 못했다.

 

마리시엔카를 진심으로 좋아한 소비에스키는 유부녀가 된 첫 사랑에게 계속 편지를 썼다. 여전히 사랑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였다. 마리시엔카도 소비에스키를 잊지 못했지만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늘 부정적인 내용의 답장을 보내야 했다.

‘저는 이제 유부녀입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도, 만날 수도 없습니다.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네요.’

 

 

영원히 이뤄질 수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의 사랑은 뜻하지 않은 행운 덕분에 돌파구를 찾았다. 자모이스키가 결혼 7년만인 1665년 2월 갑작스럽게 매독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모든 재산은 마리시엔카에게 넘어갔다. 그녀에게는 자식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를 일곱이나 낳았지만 모두 어릴 때 죽고 말았다.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두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의 결혼은 당시 폴란드 귀족사회에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귀족들이 사랑을 매개로 결혼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결혼은 정치적 거래였다. 그런데 미망인과 총각이 서로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득이 안 되는 결혼을 한다는 걸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왕 자리에 오른 장군

“여보, 내게는 꿈이 있답니다. 바로 당신이 폴란드의 국왕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지금 내 처지에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나는 지금 이대로만 해도 충분하다오.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마시오.”

마리시엔카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아주 똑똑한 여성이었다. 군인이어서 싸움만 잘 했던 남편과는 달리 폴란드 궁정의 정치 상황과 귀족 사이의 역학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정치역학을 잘 활용해서 남편을 왕으로 만들 계획을 추진했다.

사령관으로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선 소비엔스키는 연전연승을 거뒀다. 코사크 군을 무찔렀고 오스만투르크의 침입을 연거푸 저지했다. 그가 오스만투크르를 막지 못했다면 유럽은 이슬람군의 칼날아래 무참히 쓰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유럽 역사학자들은 그를 스페인에서 쳐들어온 이슬람군을 막아낸 ‘샤를마뉴’에 버금가는 '유럽의 구원자'로 평가한다.

소비에스키는 1673년 11월 11일에도 전투에 나서 오스만투르크 군을 다시 대파했다. 그런데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미하우 국왕이 급서했다. 국왕 별세로 슬픔과 불안에 빠진 폴란드에 전해진 전쟁 대승 소식은 국민을 환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스만투르크가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프로이센도 호시침침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소비에스키 장군 뿐입니다.”

마리시엔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하우 국왕이 후사를 두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폴란드 새 국왕은 귀족 투표로 뽑게 돼 있었다. 그녀는 폴란드의 귀족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남편을 나라의 새 지도자로 선출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미 소비에스키의 능력을 인정하던 귀족 대부분은 이듬해 5월에 벌어진 투표에서 그에게 몰표를 던졌다.

 

 

소비에스키는 정치를 싫어했고, 정치적 능력도 부족했다. 그는 힘든 정무를 대부분 아내에게 떠넘겼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아 마리시엔카는 늘 뒷수습에 애를 먹곤 했다. 이 탓에 그녀를 헐뜯는 소문이 궁정 안팎에 퍼지기도 했다.

“새 왕비는 프랑스에서 천한 출신이었어. 얼굴 하나 믿고 남편을 잘 만난 덕분에 왕비가 된 거야.”

“마리시엔카는 아주 비열하고 잔인한 여자야. 소유욕이 강하고 악마 같아. 남편을 꼭두각시처럼 배후조종한다잖아!”

소비에스키 부부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게 되더라도 보복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말로 실컷 떠들라지! 그래봤자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소비에스키 부부는 금슬이 무척 좋았다.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는 시간만 아니라면 늘 함께 지냈다. 하루 종일 붙어 살면서 산책을 같이 즐겼다. 둘이서만 카드게임을 하며 깔깔 웃기도 했고, 밤새 가족끼리 파티를 하면서 박장대소하거나 춤을 추었다.

소비에스키는 왕이 되기 전이나 된 이후 전쟁터에 나가면 늘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아내는 반드시 답장을 적어 보냈다. 편지에는 서로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와 어린 자녀들의 안부는 물론 폴란드의 정치상황, 미래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의 편지는 나중에 책으로 출간됐다.

‘아버지를 자주 못보는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는지 모르겠군.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너희들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전해주시오.’

 

■왕의 가족을 위한 여름 별궁

소비에스키 부부는 왕궁 생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소비에스키는 농촌 출신인데다 군인이어서 왕궁의 엄격한 예의범절을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마리시엔카 역시 귀족 태생이 아니어서 왕궁 생활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그만 살도록 합시다. 남들이 뭐라고 떠들든 우리만의 거처를 만들어 마음 편하게 살도록 합시다.”

소비에스키는 왕비와 아이들을 위한 별궁을 따로 만들기로 했다. 그는 원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이 적지 않았다. 아내가 폴란드 최고 부자로 불렸던 첫 남편 자모이스키에게서 유산으로 챙긴 재산도 엄청났다. 여기에 ‘자리’와 ‘특혜’를 부탁하는 사람이 챙겨주는 뒷돈도 상당했다. 두 사람은 이를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소비에스키는 바르샤바 외곽의 밀라누프라는 마을에 있는 작은 저택을 매입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겨우 벽만 붙어 있던’ 저택이었다. 그는 먼저 마을 이름을 라틴어인 비야 노바로 바꿨다. 나중에는 폴란드어로 변해 빌라누프가 됐다.

소비에스키는 당시 폴란드 최고 건축가이면서 가장 신뢰하던 측근이던 아우구스티나 빈첸테고 로치에고에게 공사를 맡겼다.

“우리 부부가 평온하게 살 수 있는 집을 하나 지어주시게.”

 

 

마리시엔카는 마리 루이사를 따라 폴란드로 오기 전 베르사유 궁전에서 여러 해 동안 살았다. 그래서 프랑스 궁전의 구조와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가족이 사용할 궁전인 만큼 직접 건축에 관여하기도 했다.

1681년에 시작된 공사가 끝난 것은 15년 뒤인 1696년이었다. 소비에스키 부부는 빌라누프 궁전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미리 들어가 살았다. 그들은 이곳을 주로 여름 별궁으로 사용했다. 물론 여름이 아니더라도 휴식이 필요하면 수시로 찾아갔다.

소비에스키 가족의 빌라누프 궁전 생활은 당시 유럽 다른 왕실과 매우 달랐다. 그들은 왕족처럼 살지 않고 시골 사냥꾼 가족처럼 생활했다. 한 시종이 일기에 쓴 글이 당시 상황을 잘 설명한다.

‘왕은 하루 종일 가족과 함께 말을 타고 사냥하기를 즐겼다.’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다른 왕실과는 천양지차였다. 당시 유럽 왕실에서는 왕비가 자녀를 키우지 않고 보모나 가정교사에게 맡기는 게 관행이었다. 그렇게 해서 왕궁의 예의범절이나 교양, 문화 등을 가르쳤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마리시엔카는 아이들을 직접 키우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같이 지내면서 정원에서 꽃도 따고 산책도 하며 지냈다. 그녀의 뜻은 매우 훌륭했지만 아이들이 ‘교양 있는 왕족의 문화’를 배울 기회는 줄었다.

 

 

소비에스키 부부가 빌라누프 궁전에서 지낸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궁전이 완공되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소비에스키는 병에 걸려 침대에 눕고 말았다. 원인은 매독이었다. 마리시엔카가 전 남편에게서 전염됐고, 다시 소비에스키를 전염시키고 만 것이었다. 궁전 주치의는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고 아뢨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회복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편안하게 마지막을 준비하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마리시엔카는 남편을 바르샤바로 데려가지 않고 빌라누프 궁전에서 치료를 받게 했다. 이곳에서 마지막 추억을 만들겠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마리시엔카는 하루 종일 남편이 누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책을 읽어주었다. 때로는 혼자서 왕의 몫까지 다해 카드놀이를 했다. 왕은 그런 왕비의 모습을 보며 힘겹게 웃곤 했다.

소비에스키는 1696년 6월 17일 잠시 마지막 아침 산책을 다녀온 뒤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마리시엔카는 눈물을 삼키며 남편을 보냈다.

“전하, 행복한 세월이었습니다. 미천한 저를 평생 아낀 것도 부족해 왕비로 만들어 주시고…. 저승에 먼저 가서 기다리시면 천천히 뒤를 따라가겠습니다.”

한편 소비에스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남 야쿠프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왕이 아들을 남겨두고 별세할 경우 귀족은 그의 아들을 차기 국왕으로 선출하는 게 관례였다. 국왕 선거에는 야쿠프를 포함해 무려 18명이 출마했다.

마리시엔카는 국왕이 될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들을 밀지 않고 사위를 지지했다. 뜻이 갈라진 가족의 표는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엉뚱하게 폴란드 국왕으로 뽑힌 사람은 독일 출신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였다. 마리시엔카의 가족은 왕궁에서 쫓겨나 유럽 여러 나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제각각 외롭게 인생을 마감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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