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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페스트부다’라고 하면 이상하지 않나요?

[유럽 인문학 기행-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탄생

헝가리 수도는 부다페스트다. 부다 지구와 페스트 지구, 오부다 지구를 합친 도시다. 대부분 도시의 이름에는 뜻이 있다. 부다페스트에 처음 갔을 때 이 도시의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1873년에 세 지구를 합칠 때 부다와 페스트의 이름을 따서 붙여 부다페스트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다. 오늘은 부다페스트라는 도시가 생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도시 통합으로 새 수도를

 

19세기에 헝가리는 수백 년째 오스트리아의 속국 노릇을 했다. 훈족의 후예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오스트리아 왕의 지배를 받았다. 수도는 브라티슬라바였다. 이곳은 지금은 슬로바키아의 수도이지만 당시에는 헝가리 영토였다. 브라티슬라바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에 너무 가까워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한 도시였다. 그래서 수도를 동쪽으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늘 존재했다.

 

헝가리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추구한 1848~49년 헝가리 혁명 도중에 부다와 페스트를 합쳐 헝가리의 새 수도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맨 처음 터져 나왔다. 두 지역의 통합을 주도한 정치인은 세체니 다리를 만든 귀족 세체니 이슈트반이었다. 독립주의자였던 그는 당시 헝가리 정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었다.

 

세체니는 “부다와 페스트, 오부다를 합쳐 새로운 대도시를 만들어 수도로 삼아야 헝가리는 치열한 유럽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헝가리의 정치인, 기업인은 물론 문화예술인, 평범한 국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논쟁에 뛰어들었다.

 

부다는 왕궁이 있는 지역이다. 부다페스트에 여행을 가면 꼭 들러야 하는 부다 성과 어부들의 성채, 마차슈 성당 등이 있는 곳이다. 과거에 왕들이 살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헝가리의 수도였다. 그런데 왕궁이 있다는 점만 빼면 이곳은 인프라가 아주 낙후된 지역이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현대적 도시라기보다는 군사 거점의 역할만 하고 있었다. 재정 문제도 심각했고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페스트와 비교할 때 매우 낮았다.

 

반면 페스트는 무역과 통상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문화, 정치적으로도 급성장하는 지역이었다. 그 덕분에 유럽에 퍼지고 있던 다양한 근대적 변화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18~19세기에 전국에서 기술자들이 페스트로 몰려든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도시의 팽창은 당연히 새 이주민을 수용할 주택 건설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페스트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바로 홍수였다. 1838년 홍수 때에는 도시의 절반이 물에 잠겼다.

 

당시 두 지역의 인구는 빠른 속도로 늘고 있었다. 1800년대 초 부다의 인구는 2만 9천 명, 페스트의 인구는 2만 5천 명이었다. 1848년에는 부다 5만 명, 페스트 13만 명으로 엄청나게 증가했다.

 

 

■페스트부다 또는 부다페스트

 

부다와 페스트에 사는 주민의 반응은 뜨거웠다. 정확히 말하면 두 지역 주민은 모두 통합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고 분명했다. 먼저 두 지역은 도나우 강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지만 역사적, 문화적으로 오랫동안 서로 다른 곳이었다. 생활형태, 전통, 정체성은 판이했다. 부다는 오랫동안 누려왔던 수도의 역할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다. 페스트는 통합 이후 생길지 모르는 재정적 어려움을 걱정했다. 통합해야 하는 두 지역의 주민이 모두 반대했기 때문에 통합은 사실상 물건너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두 지역 주민의 태도를 바꾼 결정적 계기가 발생했다. 헝가리 혁명을 분쇄하려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이 헝가리로 쳐들어온 것이었다. 주저할 여유가 없었던 부다와 페스트는 통합에 합의했다. 1849년 봄 공식 통합 작업이 시작됐다.

 

문제는 새 도시의 이름이었다. 세체니는 페스트라는 지명을 매우 싫어했다. 악명 높은 역병 페스트를 연상시킨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만약 새 도시를 페스트라고 부른다면 외국인들이 얼마나 놀리면서 웃을지 걱정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페스트 주민의 생각은 달랐다. 페스트의 원래 뜻은 ‘화로’ 또는 ‘불덩이’였다. 게다가 헝가리 발음으로는 페스트가 아니라 페슈트였다.

 

도시 이름을 어떻게 정할지를 놓고 다시 긴 논쟁이 벌어졌다. 여러 개의 새로운 이름이 제안됐다. ‘매혹의 정원’이라는 뜻을 가진 바케르트, ‘다뉴브의 진주’라는 의미인 두나지욘기예 등등이었다. 헝가리의 옛 조상인 훈족을 상징하는 ‘훈족의 성’이라는 뜻인 훈바르도 있었다.

 

 

오랜 논의 끝에 새 통합 도시를 ‘페스트-부다’로 부르기로 했다. 페스트가 부다보다 인구가 많은데다 경제적으로 더 큰 도시였기 때문에 페스트라는 이름을 앞에 붙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새 이름에 실용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지도에 표시할 때 애매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부다페스트 지도를 보면 부다 지구는 도나우 강의 왼쪽에, 페스트 지구는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반면 새 도시 이름에는 페스트가 왼쪽에, 부다가 오른쪽에 있다. 이 이름을 지도에 표기한다면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름의 순서를 바꿔 부다페스트로 짓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름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사이에 헝가리 혁명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 의해 강제 진압당하고 말았다. 부다와 페스트의 통합 작업도 물거품이 됐다. 통합에 앞장섰던 세체니는 물론이거니와 많은 헝가리 정치인이 외국으로 달아났다.

 

통합 작업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것은 18년 뒤였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1867년 3월 20일 대타협을 맺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대타협의 주요 내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원 제국 창설,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국왕 겸임, 헝가리 헌법 및 독립적 사법제도 복원, 헝가리 의회 재구성 등이었다. 한마디로 헝가리에는 상당한 자치를 보장한다는 이야기였다. 외교와 전쟁은 제국에서 담당하지만 다른 분야는 모두 헝가리가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대타협이 이뤄지고 6년 뒤인 1873년 11월 17일 부다, 페스트, 오부다 지구의 행정관이 한 자리에서 만나 통합 부다페스트의 새 행정관에게 도시 행정권을 이양했다. 이날은 나중에 ‘부다페스트의 날’로 지정됐다.

 

 

■현대 도시로의 변화

 

도시 통합은 헝가리와 부다페스트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유지된 1867~1918년 사이 51년 동안 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교통, 무역, 예술도 급성장했다. 헝가리 군대도 생겼고 현대적 교육 체계도 만들어졌다.

 

가장 큰 변화는 수도인 부다페스트에서 이뤄졌다. 부다페스트는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가 됐다. 19세기 말에는 인구가 75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20년 만에 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경제도 크게 성장한 덕분에 예술을 부흥시키는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예술가는 기업가의 후원을 받아 서유럽에 가서 공부를 하고 고국에 돌아오곤 했다. 헝가리를 대표하는 음악가인 프란츠 리스트가 맹활약한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부다페스트의 모습이 형성된 것인 이 시기였다. 구불구불한 골목 같던 도로는 사라지고 안드라시 대로 등 시원시원하게 직선으로 쭉 뻗은 새로운 현대식 도로가 생겼다. 유럽에서는 최초로 전기식 지하철이 안드라시 대로 지하에 건설된 것도 이때였다.

 

 

여기에 국회의사당도 건설됐고, 오페라 하우스 등 각종 극장, 뉴욕 카페, 카페 제르보 등 유명한 커피전문점, 세체니 온천과 겔레르트 온천 등도 만들어졌다. 페스트와 부다 사이를 흐르는 도나우 강에는 다리가 3개 건설됐다. 헝가리 건국 1천 주년인 1896년에는 부다페스트 국제박람회가 열려 급성장하는 도시의 위용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