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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박관현 열사가 “광주일보 지지” 성명 냈던 이유는

[들블열사기념사업회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기록물’ 첫 공개]
80년 당시 광주일보 기자들 ‘5·13 언론자유실천선언’에
“언론의 장거를 환영한다” 전남대 총학 명의 자필 성명
윤상원 열사가 노트에 직접 쓴 박기순 열사 묘비명 등도 전시

 

 

“언론의 장거를 환영한다-광주일보(옛 전남매일신문) 5·13 언론자유투쟁선언을 지지하며”

1980년 5월 14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명의로 작성된 성명서가 처음으로 공개된다.

16일 (사)들불열사기념사업회에 따르면 5·18민주화운동 42주기를 맞아 20일까지 광주시 동구 지산동 ‘오월의 숲’(들불열사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기록물’전시회가 열린다.

그동안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 자료들이 새롭게 발굴되면서 일부 자료가 대중에게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
 

이번에 수집된 자료들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들불야학 문집1,2,3호를 비롯해 박기순 열사 영결식과 관련된 윤상원 열사의 메모, 형님의 죽음을 맞이한 윤상원 열사 동생 윤태원씨의 일기, 윤상원·박관현 열사의 일기 일부(노트)와 들불야학 회의 기록 등 수 십 여점이다. 또 1980년 초반 전남대 학원자율화투쟁 과정에서 발행된 각 단위의 자료들(전남대어용교수퇴진 결의문 등)과 유인물들, 민족민주화성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 기록과 메모들(국군장병에게 보내는 메시지 등), 신영일 열사의 친필 엽서 등이다.

특히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고(故) 박관현 열사가 5월 13일 광주일보(옛 전남매일신문) 기자 36명 명의로 낸 언론자유 투쟁선언을 환영하면서 낸 성명서가 눈길을 끈다.
 

지난해 7월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자격으로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했을 묘비를 어루만졌던 박관열 열사는 5·18 당시 도청 앞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단식투쟁을 40일간 벌이다 1982년 10월 옥사했다.

1980년 4월 중순 이후 5월 10일까지 중앙 언론사를 중심으로 ‘보도 검열 철폐’를 촉구하는 언론자유 실천 선언이 터져나왔다. 언론이 신군부 검열을 받으며 억압받는 상황은 기자로서 권리 포기이자, 책무 포기였다는 점에서다. 대학생들을 비롯 사회 각계각층의 저항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언론의 엎드린 모습은 자성의 대상이었다.

광주일보(옛 전남매일신문) 기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0년 5월 12일 일부 기자는 ‘언론자유 실천 선언’ 문제를 끄집어내 7가지 반성과 5개의 결의를 담은 ‘5·13 언론자유 실천 선언’을 제작하고 다음날인 13일 동료 기자들의 동의를 구했다.

당시 35명의 편집국 기자가 서명에 참여했고, 이후 1명이 추가로 서명함으로써 총 36명의 기자가 언론자유 실천선언에 참여했다.

이에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민족민주화성회를 출정하면서 “광주일보(옛 전남매일신문) 36명 기자일동이 자신들의 과오를 크게 반성하고 언론자유 실천을 선언한 것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역사의 부름에 응한 장거”라며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한다.

자필로 쓰여진 이 지지 선언문이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5·18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옛 전남도청에서 마지막까지 항거하다 최후를 맞은 고(故) 윤상원 열사의 기록들도 눈길을 끈다.

특히 윤상원 열사가 노트에 직접 적은 박기순 열사의 영결식 안내문과 묘비명이 공개됐다. 윤 열사가 사후에 자신과 영혼결혼식을 올린 박기순 열사의 영결식을 주관하면서 기록한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박기순, 윤상원 열사를 기리는 노래로 유명하다.

박기순 열사는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에 부품을 납품하는 동신강건사에 일당 800원을 받는 조립 견습공으로 입사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 강의를 하는 생활을 하다 1978년 12월 26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윤상원열사의 노트에는 1978년 12월 27일 오전 11시 전남의과대학 부속병원 영안실에서 학우장으로 진행된 박기순 열사의 영결식 안내문과 식순 뿐 아니라 “여기 노동자의 누나 박기순 고이 잠들다”라고 자필로 적은 묘비명이 담겨있다.

윤상원 열사 동생인 윤태원씨의 일기장에는 1980년 6월 1일 일기에도 “우리집 횃불이요, 등대 같았던 형님 소식이 없다”며 애태운 내용이 포함됐다. 같은 날 일기에는 “오후에 혼자 방에 있자니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속칭 형사들과 계엄군 등 불청객들의 방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윤상원 열사)을 찾으러 왔다며 온 집안을 샅샅히 뒤졌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윤상원 열사를 찾기 위해 신군부도 혈안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또 5·18민주화운동 이후, 1980년대 중, 후반 광주지역에서 진행됐던 청년, 노동, 여성, 교육 운동 분야의 기록물도 포함됐다. 대부분의 자료에 ‘5·18정신을 이어 받자’라는 내용이 포함된 점에서 5·18은 이후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의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다.

각종 유인물과 자료집 및 친필 회의록 등을 통해 5·18 이후 분화, 발전해가는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 전시회에 전시되는 자료를 포함 모든 자료는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 소장될 예정이다.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 학술부장이던 최용주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은 “당시 총학생회장인 박관현 선배의 지시로 작성된 성명서이고 언론에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해당 자료는 1980년 5·18을 앞둔 시기에 대한 조사를 위해서 연구가치가 있는 소중한 자료다”고 말했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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