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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이름 없이 산화한 5·18 시민군 형 … 그 뜻 이어 생명평화운동

1980년 5월 최후의 항쟁에 참여
‘폭도’로 낙인 찍혀 유죄 판결
“가족에 미안” 유서 쓰고 극단 선택
2019년 뒤늦게 재심서 무죄 판결
대학생 돼서야 형 삶 제대로 알아
‘이름없이 죽어 간 블록공 이정모’
형 일대기 책으로 발간

 

광주일보는 5·18민주화운동 42주기를 맞아 ‘우리 가족의 5·18, 그리고 나의 5월’이라는 제하의 기획기사를 연재한다.

항쟁이 일어난지 42년이 흐르면서 10~20대에게는 ‘역사’가 돼버린 80년 5월 그날을 5·18 희생자와 가족의 삶을 통해 현재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기획이다. 또한 극우세력의 줄기찬 왜곡 시도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흐릿해지는’ 80년 5월 광주의 이야기를 되새기기 위한 작업이다.
 

광주시민 이해모(53·산수동)씨는 지난 5월 1일 책 한권을 펴냈다.

제목은 ‘이름없이 죽어간 브로크공(블록공) 오월시민군 이정모’. 지난 수십년 간 벼르고 별렀던 자신의 형 일대기를 기록한 책이다.

지난 3일 취재진과 만난 해모씨는 자신의 책에 대해 “이름 없는 어떤 5월 시민군, 5·18의 트라우마로 극단적 선택을 한 시민군이 5·18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이름 속에서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해모씨가 펴낸 책의 주인공 이정모씨는 1980년 5월 전두환 계엄군의 유혈진압에 맞서 광주 공동체를 지키는데 나섰던 ‘광주 시민군’ 출신이다. 5·18 이후 ‘혼자 살아남아 죄스럽다’ ‘폭도로 낙인찍힌 삶 끝내려 한다’며 스스로 세상을 등진 48명 가운데 한 명이다.

 

 

 

해모씨가 펴낸 책과 5·18기념재단 등에 따르면 이정모씨는 5·18 시민 항쟁 최후의 날인 1980년 5월 27일까지 금남로에 남았다가 ‘소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폭도로 낙인 찍혀’ 가족과 갈등을 겪던 그는 1984년 12월 “부모님과 가족에 미안하다. 나는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떠났다. 그의 나이 스물 여덟이었다.
 

5월 시민군 이정모씨는 화순군 동면 오동리에서 4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5·18이 일어나기 전만해도 고향 화순에서 기와와 벽돌을 찍는 일을 했다. 화순읍 벽돌공장 공원으로 매월 8만원의 월급 대부분을 저축하면서 ‘소를 키우는 농장주’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80년 5월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되면서 평온했던 가족은 운명이 바뀐다.

당시 전남대 법대생으로 집안의 기둥이었던 큰아들을 화순으로 서둘러 데려오기 위해 부친과 둘째 정모씨가 서로 사정을 모른채 각각 광주로 출발하면서다. 부친과 정모씨 모두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학생과 시민들을 잡아 죽인다’는 소문을 접하고 떠났으나, 정모씨는 부친, 큰형과 달리 제때 돌아오지 못했다.

둘째인 정모씨가 전남대 앞에서 형을 애타게 찾다가 시민들 참상을 목격하고서 시민군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첫날인 21일 광주공원 앞에서 시위대와 하룻밤을 지새운 정모씨는 22~23일에는 계엄군이 퇴각한 전남도청 정문 앞에서 보초를 섰다. 23일부터 항쟁 마지막날인 27일까지는 전일빌딩 입구에서 칼빈총을 들고 지켰다.

27일 옛 전남도청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작전 끝에 함락되자 전일빌딩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그는 운좋게도 금남로를 벗어났지만, 28일 오전 다시 형을 찾아 전남대 쪽으로 향하던 중 계엄군에 연행되고 만다. 며칠 째 갈아입지 못해 남루해진 옷이 검거의 빌미가 됐다.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그는 5개월 동안 모진 구타와 갖은 고문을 당했다. 계엄당국은 그를 ‘형을 찾아 나섰던 평범한 청년’에서 ‘가난 때문에 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자’, ‘전남 출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자’로 만들었다. 결국 같은 해 10월 군사재판에서 소요죄 등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다행히 집행유예로 석방됐지만 그는 ‘폭도’로 낙인 찍힌 삶을 살아야 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술에 의지하면서 가족과도 불화가 잦아졌다. 고향집을 가면 아버지와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가족으로부터 멀어지게 됐다. 결국 그는 1984년 12월 광주 한 여인숙에서 세상을 등졌다.

정모씨가 숨진 지 35년 만에 법원은 2019년 11월 재심을 통해 그에게 씌워졌던 ‘폭도’라는 낙인을 걷어냈다. 정모씨가 한 행위는 “전두환 등의 헌정질서 파괴범죄에 맞선 정당행위”라고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정모씨보다 16살 어린 동생 해모씨는 대학생이 되고서야 5·18에 대해 제대로 알게됐다고 한다. 형 정모씨가 젊은 날에 왜 그렇게 술을 마시시고 방황했는지, 왜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게 됐는지 이해하게 된 것도 그무렵이다.

“둘째 형(정모씨)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때문에 항쟁의 한복판으로 갔다기 보다, 광주에서 우리 이웃들이 무참히 짓밝히고 죽어가는 것을 그냥 둬선 안된다는 생각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이건 옳지 못하다며 분노가 끓어올랐던 거죠”

해모씨가 사회 참여를 활발하게 하는 것도 어쩌면 형 정모씨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학생 시절 불교에 빠져들기 시작한 해모씨는 2008년 광주에서 불교환경연대를 꾸리고 15년째 활동을 이어오면서 생명·평화·인권운동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해모씨는 지난해 5·18기념재단에서 진행한 5·18 기록물 유네스코 지정 10주년 기념전에서 둘째 형 정모씨의 자필진술서·경찰조서·재판기록 등을 처음 본 뒤 또다른 바람이 생겼다.

시민들이 익히 아는 시민군 이야기 못지 않게 이름을 남기지 않고 공동체를 위해 스러져 간 5월 광주 시민들의 삶을 제대로 기록하겠다는 것이다.

해모씨는 오는 21일 광주시 동구 전일빌딩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브로크공(블록공) 오월시민군 이정모’ 출판기념 북콘서트를 시작으로 광주와 전국 곳곳을 돌며 이름없이 스러져간 5월 시민군 이야기를 알릴 예정이다.

/글·사진=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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