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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중공군 참전으로 국제전 변질…한반도 분단 최대 피해자 한민족

(20)국·공 내전과 한반도분단 고착

 

 

일제시대 만주·중·미·러 각지서
항일운동하며 밀접한 관계 유지
이념 대립 6·25전쟁으로 이어져
조선인 200여만 살고 있던 만주

 

국·공 내전 승패 결정하는 거점
만주 잔류 조선인들 공산군 입대
내전 승리후 의용군 북한군 합류
병력 쌓이자 남침 6·25전쟁 발발
美 주도 UN군·일본·소련도 참전
1953년 휴전 남북 분단 69년 흘러



#10월10일 협정 파기 中 국·공 내전

1910년 8월 조선(대한제국) 멸망 전후로 서울의 이회영 가문과 안동 이상룡, 김동삼, 이육사 가문, 해주의 안중근 가문, 그리고 최재형, 김좌진, 안창호, 김구, 이승만, 윤봉길, 김원봉, 서일, 홍범도, 이봉창, 백정기, 박열, 김창숙, 김두봉, 최용건, 김무정, 이홍광(이홍해), 김일성(김성주), 김책(김홍계), 강건(강신태) 등 수 많은 인사들이 만주와 중국, 미국, 러시아 등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①김구는 장제스의 중국 국민정부와 ②김원봉, 김두봉, 김무정 등은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세력과 ③이승만은 미국과 ④김일성, 김책, 강건 등은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⑤박헌영과 이승엽, 여운형 등은 주로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했다. 이는 나중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들 중 끝까지 살아남아 정권을 장악한 사람이 이승만과 김일성이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은 미·소·영·중 등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중국 공산당 근거지 싼시성 옌안의 홍군(공산군) 지휘관 주더(朱德)는 그해 8월 김무정 등에게 조선인 200여만명이 살고 있던 만주로 이동, 군사기지를 구축할 것을 명했다. 당시 만주는 일본 관동군을 무장해제시킨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1930년대 이후 일제가 건설한 대규모 공업시설이 있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국민정부의 임시수도 충칭에서 평화회담을 개최했다. 공산당은 91만 병력과 120만 명의 당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국민당에 비해서는 절대 열세였다. 회담 결과 10월10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전을 피하고, 독립·자유·부강의 새 중국을 건설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10·10 합의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내전이 계속됐다. 린퍄오의 공산군 주력 제4야전군은 중요 이동수단인 철도 노선을 점령해가면서 만주로 이동했다. 만주에서의 승패가 내전의 향방을 결정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트루만 미국 대통령이 파견한 마셜 특사는 1946년 1월 국부군(국민정부군)의 우위를 인정하는 내용의 국·공 정전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국부군, 공산군 어느 측도 협정을 준수하지 않았다. 국부군은 공산군에 대해 4대1 이라는 압도적 군사력을 배경으로 1946년 3월 ‘10월10일 협정'을 파기했다. 국부군은 그해 6월 공산군에 대해 총공세에 나섰다. 마오쩌둥은 같은 달 린퍄오에게 소련군의 만주 철수가 이행되는 즉시 창춘과 하얼빈 등 대도시들을 점령할 것을 지시했다. 공산당은 ‘향북발전 향남방어(向北發展 向南防禦)'를 모토로 만주에서의 승리, 황허(黃河) 이남 방어를 목표로 정했다. 공산군은 1946년 5월 점령지역 내 토지개혁을 실시해 정치·군사적 기반을 확대했다. 토지개혁으로 인해 1947년 초 이후 만주에서의 분위기가 일거에 공산군에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국부군은 부패와 민중에 대한 탄압까지 더해 지지를 상실해 갔다.

중국 자문관으로 파견된 미국 장군 웨드마이어는 1945년 후반 장제스에게 만주로 전선을 확대하지 말고 만주를 미·중·소·영·프 등 5대국 통치에 맡기는 한편, 만리장성 이남에는 유능한 행정관리를 파견, 국부군의 지배를 공고히 할 것을 건의했다. 장제스는 이를 거부했다. 웨드마이어는 미국 정부에 7개 사단 파병을 요청했으나 미국 정부는 2개 해병대 사단만 중국에 파병했다. 마오쩌둥은 1945년 6월 중공 제7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우리가 만주를 장악한다면 승리의 토대를 확보하는 셈이고, 승리는 결정된 것이다”라고 연설했다. 장제스 역시 “만주가 없으면 중국도 없다”, “우리가 만주를 점령하지 않으면 중국이 산업국가로 발전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린퍄오 등 고위간부 2만여명과 최정예 20만여 병력을 만주에 투입했다. 장제스 역시 ‘동북정치위원회'와 ‘동북보안사령부'를 설치해 슝스후이를 주임, 두위밍을 총사령관, 순리런을 최강 신1군 사령관에 임명하고, 청더(承德)와 산하이관 등을 통해 신군 기계화사단 포함 13만7,000명을 투입했다. 아들 장징궈도 파견했다. 미군 해병대는 톈진항, 다롄항 등을 통한 국부군의 만주 배치를 적극 지원했다. 국부군은 만주의 실정을 잘 모르는 데다가 부패, 무능하기까지 했다. 소련은 미국의 동의하에 만주를 중·소 간 완충지대로 만들려 했다. 만주 쟁탈전은 중국 내부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남북의 문제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 만주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남북의 운명이 바뀔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조선혁명의 입장에서 만주가 장제스의 통치하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중국이 공산주의에 굴복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을 전후해 장제스는 한강 이북을 국부군 통제 아래 두려했다. 장제스가 아예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려 했다는 미국 기록도 있다.

1945년 8월 기준 2,300만 조선 인구의 약 9%인 216만명이 만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만주 잔류 140만 조선인의 5%인 6만 2,942명이 공산군에 입대했다. 강건, 김무정, 방호산(이천부) 등이 조선의용군을 지휘했다. 만주의 조선인들이 공산군을 지지한 이유는 공산당이 1946년 5월 대대적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한 데다가 민족차별을 거의 하지 않아서다. 이에 반해, 국부군은 만주 거주 일부 조선인들이 일본과 만주국에 부역(附逆)했다는 등의 이유로 조선인 학대와 학살을 자행했다. 중공은 1946년 7월 평양에 조선주재 동북국사무소를 설치해 전략물자 공급, 남·북 만주 간 교통·통신 확보 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김일성은 전력을 다해 공산군을 지원했다. 국부군은 1946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만주 주요 도시 공략에 나섰다. 국부군은 스핑과 창춘 전투에서 공산군 제4야전군을 격파하여 쑹화강 이북으로 밀어냈다. 화베이(華北) 국부군은 1946년 가을 공산군 화베이 야전군을 격파하고 베이징과 네이멍구, 산시를 연결하는 요충지 장자커우를 점령했다. 국부군이 스핑, 선양, 창춘 등을 점령하고, 철도 등 교통로를 장악함으로써, 공산군은 남만주와 북만주로 분리된 채 고립됐다. 이 무렵 공산군에 투항한 국부군 병력 18,000여 명 약 2개 사단이 전쟁물자 2만여t을 갖고 단둥과 지안에서 북한 내부를 거쳐 북만주로 이동했다. 공산군은 북한을 교통로로 활용함으로써 패전 위기를 극복했다. 이때 미국 대통령 특사 마셜이 장제스에게 정전을 요구했다. 1946년 6월6일 국·공 양측은 정전을 선언했다. 공산군은 소련군이 노획한 대량의 일본 관동군 무기를 이양받았다. 미국을 의식한 장제스는 바이충시 국방부장의 거듭된 재촉에도 불구하고 국부군의 북만주 진공을 명령하지 못했다. 1947년 3월 국부군에게 비워 주다시피 수도 옌안을 빼앗긴 공산군 지도부는 허베이로 이동, 시바이보를 임시수도로 삼았다.

1947년 춘계 이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보급로가 차단된 만주의 국부군은 고립되기 시작했다. 공산 제4야전군은 반격을 개시, 1947년 12월까지 선양, 창춘, 진저우를 제외한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1948년 들어 국민정부는 내전으로 인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통화개혁을 실시했으나 실패했다. 전국에 폭동이 일어났다. 미국은 중국에서 발을 뺄 준비를 했다. 장제스의 측근 천청이 지휘한 1948년 10월과 11월에 걸친 진저우, 창춘, 선양 전투에서 국부군은 공산 제4야전군에게 차례로 무너졌다. 공산군에 포위되었던 창춘에서는 16만명 이상의 아사자까지 나왔다. 국부군은 그해 11월 중하순 화이하이(淮海·쉬저우) 대회전에서도 대패했다. 1949년 1월에는 제4야전군과 화베이 야전군의 협공을 받은 핑진(베이징·톈진) 국부군도 무너졌다. 같은 해 4월에는 군벌 옌시산의 근거지 타이위안도 점령당했다. 장제스와 광시군벌 출신 리쭝런과 바이충시 등은 창장 이남을 방어, 창장 이남에서만이라도 국민당 정부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마오쩌둥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해 4월 공산군 1진 30만여명이 바지선과 뗏목으로 구성된 1만 척이 넘는 배를 타고 창장 하류 약 600km에 걸쳐 개미떼처럼 도하했다. 항공기 230대, 군함 170척으로 구성된 국부군 해·공군은 속수무책이었다. 70만 육군이 지킨 방어진지도 무용지물이었다. 1945년 8월 장제스와의 비밀협약을 통해 확보했던 조차지 칭다오 주둔 미국 해병대 병력과 7함대가 1949년 5월25일 철수했다. 마오쩌둥이 지휘한 공산군과 달리 군벌연합체 성격을 가진 국부군은 지휘, 명령 계통이 분산돼 있었다. 내전 중 수많은 국부군 부대가 쉽게 공산군에 항복해 공산군으로 편제됐다. 공산군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후 신장과 티베트를 유혈 점령했다. 마오쩌둥은 쑨원과 장제스가 깔아 놓은 중국 통일의 길을 갈아엎은 다음 바로 그 옆에 공산주의 통일국가라는 새 길을 깔았다. 장제스는 청두(成都)가 함락된 1949년 12월10일 300여년 전의 정성공과 비슷하게 일부 병력만 데리고 타이완으로 도주했다.

만주와 화베이 일대에서 활동한 조선의용군 출신 2,100명이 1945년 10월 1차로 북한으로 들어갔다. 국·공 내전 말기 김책이 마오쩌둥에게 제4야전군 소속 조선인 대원의 북한 귀국을 요청한 결과, 조선의용군은 국공 내전이 거의 끝난 1949년 말부터 대규모로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군의 중핵이 됐다. 이때 들어간 조선인 병력은 주로 북한군 4, 5, 6, 7사단에 편입됐다.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18일 중공군 139, 140, 156사단 소속 조선인 사병 14,000여명이 북한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북한군 12사단이 됐다. 그해 7월 마지막 17차로 하이난섬 점령 전투에 참전했던 조선인 사병 200여명이 북한군에 합류했다. 1950년 북한군에 합류한 병력은 중국 남부 최전선에서 싸운 공산군 주력부대였다. 마오쩌둥으로서는 군대에 이민족인 조선인 세력을 안고 갈 이유가 없었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다. 김일성은 조선인 3개 사단(북한 육군의 47% 차지)과 알렉세이 허, 남일, 박창옥 등의 기여로 고려인 1개 연대를 확보하고 난 다음 남침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됐다. 1950년 6월 25일 남침 후 조선인 위주로 구성된 사단장 이권무의 4사단(18연대)이 가장 먼저 서울을 점령하는 등 조선인들이 남침 선봉에 섰다. 북한군 중 최초로 한강을 건너 김포, 영등포를 거쳐 경기도와 충남, 호남, 서부 경남을 석권한 북한군 6사단도 국공내전 시 명성을 얻은 사단장 방호산 휘하 조선인 위주로 구성돼 있었다. 중국 잔류 조선인 병사들은 6·25 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38, 39, 40, 42군에 집중 배치되어 전장에 투입됐다. 간도는 6·25 전쟁을 전후해 전투병은 물론 통역과 의무병 파견 등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김일성은 거의 모든 군사력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다. 미국은 한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병력을 증파했다. 미군 주도 UN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냈다. UN군은 평양, 원산을 지나 압록강, 두만강 유역으로 진공해 갔다. 마오쩌둥은 10월13일 린퍄오 등 부하들의 반대는 물론 내전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 한반도에 대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마오는 거의 같은 시기에 4만 대군을 보내 티베트를 점령했다. 펑더화이가 지휘한 공산군 1진이 10월19일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도하했다. 중국 군대가 다시 한반도에 나타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56년 만이었다. 연인원 240만명의 참전 중공군 중 30% 이상이 국부군 출신이었다. 중공군 참전으로 인해 전쟁은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변질됐다. 일본은 미군 주도 UN군에 수로안내팀원과 기뢰제거팀원, 수송팀원 등 연인원 2만여 명을 파병했다. 소련도 직·간접 참전했다. 스탈린이 세계 전략 차원에서 전쟁을 주도했다는 설도 있다. 전쟁은 1953년 7월27일 휴전과 함께 끝났다. 한반도 분단은 기정사실이 됐다. 6·25전쟁 최대 피해자는 남북한과 간도의 한민족이었다. 1953년 휴전 후 69년이 경과한 2022년 한국은 G7 수준 선진국으로 발돋움했으나, 북한은 핵무기만 움켜쥐고, 세계 최악의 빈곤 전제국가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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