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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호서 지역의 마한

마한의 공간적 범위는 대체로 경기·충청·전라지역에 해당되는데, 각 지역마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문화적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백제의 정치적인 성장에 따라서 마한 영역의 축소를 의미하며, 결국 점진적으로 마한 정치체의 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겠다. 중국의 전국시대 이후 정치적 변혁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유이민들이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물질문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 시기 충청지역 즉 호서지역에서는 마한의 보편적인 분구묘와 계통이 다른 주구토광묘가 축조되고 있어 호남지역의 마한문화와 다른 문화적 양상을 띠고 있다.

호서지역의 보령 관창리에서 발견된 주구묘(분구묘)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주구묘 유적으로서 학사적인 의미가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의 종류들이 송국리형 토기, 원형점토대토기, 두형토기, 흑색마연토기 등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의 송국리문화와 초기철기시대의 문화 간에 상호 관련성을 가지며, 그 시기를 기원전 3〜2세기로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발견 당시 대부분 연구자들은 관창리유적의 주구에서 발견된 송국리 토기에 대해서 교란되었을 것이란 견해에서 그 시기를 3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최근 분구묘에서 점토대토기편들이 잇달아 발견되고 있어 그 시기를 청동기시대 송국리문화 단계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의견들이 개진되고 있다. 이후 이러한 주구묘는 마한의 보편적 묘제로서 대형 분구묘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천안의 청당동유적에서는 주구묘와 같이 주구가 굴착된 토광묘가 조사되었는데, 역시 마한의 분묘로 이해되어 왔다. 이후 주구토광묘는 공주시와 연기군, 청주일대에서 그 발견 예가 증가하고 있다. 주구의 형태는 대부분 눈썹 형태로 경사의 위쪽에서 매장부 시설인 토광을 감싸고 있지만, 청주 송절동이나 공주 하봉리에서는 토광을 거의 두르듯이 감싼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한편 주구토광묘의 매장부인 토광은 주구에 비해 매우 깊게 굴착되어 있는데, 이는 주구묘의 매장부가 토광일지라도 분구 중에 위치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주구토광묘의 출토유물은 원저단경호와 심발형토기를 기본적인 셋트로 하지만, 장신구류인 청동제 곡봉형대구(曲棒形帶鉤)와 마형대구(馬形帶鉤), 그리고 유리제 구슬 등이 부장되기도 한다. 이 가운데 천안 청당동에서 출토된 두 종류의 청동대구(帶鉤)에 대한 분석결과 중국 북부지역에서 생산되는 청동임이 밝혀져 대외교섭의 근거로 보았다. 곡봉형대구는 중국 전국시대부터 서진시기까지 폭넓게 발견되고 있고, 한반도에서는 낙랑의 분묘에서 발견된다. 또한 호형(虎形)이나 마형대구는 청원 오창, 영천 어은동, 경주 사라리, 김해 양동리와 대성리 등의 목곽묘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그 공간적 범위를 통해 중국 북부 ⤍ 낙랑 ⤍ 호서지역 ⤍ 영남지역으로 전파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문화의 전파 루트나 유이민의 이동경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국지」 위서 진한전의 기록을 보면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으며, 진(秦)의 고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이 동쪽의 땅을 할애해 주었다”라는 내용과 더불어 언어 역시 마한인과 다르며 진인(秦人)과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사기」와 「후한서」에서도 위만의 망명기사와 더불어 “한과 예가 강성하여 군현통제가 불가해지자 많은 유이민이 한으로 건너갔다”라는 기사를 통해 진·한대를 거치면서 중국에서 많은 유이민의 이입은 물론 물질적 교류가 활발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전국시대의 진국(秦國)에도 주구토광묘와 유사한 속성을 가지는 위구묘(圍溝墓)가 축조되고 있었다. 따라서 호서지방의 주구토광묘 축조집단의 뿌리는 진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유이민과 깊은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의 마한세력은 재지전통이 강한 주구묘 축조집단과 유이민집단이 어우러져 형성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기고 desk@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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