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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조선시대 핫 플레이스, 강원의 명소는 지금]인근 세곡모아 한양으로 배 띄우던 나루 흐르는 강은 영화도 슬픔도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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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흥원창-(17)

 

 

땔나무, 숯, 생선, 소금을 싣고 한강을 따라 서울로 오르내리길 10년, 흉년에 쌀을 서울로 가져가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 사람이 있었다. 강을 이용해 장사하는 일을 주판(舟販)이라 했는데, 안석경(1718~1774년)의 ‘삽교만록'에 실려 있다. 주인공은 원주 법천에 살았으니, 바로 흥원창을 배경으로 한 장사꾼 이야기다.

인근 곡식모아 한양에 수납하던 부자동네
풍광 또한 빼어나 정약용·정범조도 찬사


한강은 물산과 인물을 소통시키는 매우 중요한 수로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흥원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섬강의 북쪽 언덕에 있으며 원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원주와 평창·영월·정선·횡성 등의 전세와 세곡을 수납하여 조운으로 서울에 가져간다.”

조선뿐만 아니라 이미 고려 때 조운제도가 있어서 남방 연해안과 한강 수로변에 12조창을 두고 조세로 징수한 미곡이나 포목을 선박으로 운송했다. 흥원창은 한강의 대표적인 창고였다. 조선 후기에 흥성했던 흥원창의 모습은 1796년에 정수영(1743~1831년)이 그린 ‘한·임강명승도권'에 남아 있고, 정약용의 시 속에도 살아 있다.

1819년 4월15일, 정약용은 큰 형과 함께 충주로 가던 중 흥원창을 지날 때 “흥원포(興元浦)에 있는 옛 창고 건물은/ 가로지른 서까래 일자(一字)로 연했어라”라고 묘사했다. 창고 건물들이 강변을 따라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성해응(1760~1839년)이 좋은 땅(명오·名塢) 중 하나로 선택한 곳은 흥원창이었다. 배가 다니는 강이 넓게 트여 양쪽 기슭의 사람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리(地理)가 가장 좋은 곳으로 관동 일대의 곡식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흥원창의 백성은 배를 운행하는 일에 종사해서 부자가 된 자가 많았다. 법천리에 살던 정범조(1723-1801년)는 ‘섬강곡'에서 강변에 70가구가 있을 정도로 번창한 흥원창을 그린다.

등불 켜고 나무 사이로 지나가니

아마도 한양에서 오는 배겠지

금년에는 소금이 풍년이니

소금값을 따지지도 않겠지


흥원창과 인접한 섬강은 정범조의 ‘현산유거기'에서도 묘사된다. “초당의 서쪽에는 큰 강이 흐르는데 산과 나란히 북으로 달려 서쪽으로 꺾이면 한강이 된다. 오르내리는 배가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너머로 날마다 뚜렷하게 보이며 오리와 갈매기들이 날아서 모이는 모습이 모두 책상 앞에서 보인다. 초당에서 북쪽으로 3리 떨어진 곳에 멀리 하늘에 의지하여 높다란 것이 섬암(蟾巖)이다. 바위 절벽이 비가 오고 나면 더욱 파랗게 되어 섬암 곁의 인가가 어리비친다.”

정범조는 작은 배를 서쪽 강에 띄우고 아래로 내려갔다. 섬암을 구경하다가 지겨우면 돌아왔다. ‘봄날 어른과 아이를 이끌고 섬암까지 배를 띄워 노닐다'란 시를 짓기도 했다.

안석경 소설의 결말이 궁금하다. “원주 법천 땅의 장사꾼은 흉년에 쌀을 싣고 서울로 향하였다. 10년 동안 거래하던 객주는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사꾼은 쌀 몇 되의 도움 요청에 대해 들은 척도 않고 다른 객주 집으로 갔다.

그 뒤 다시 옛 객주에게 다시 가보니 죽은 줄로 알았던 그 객주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부자가 돼 있었다. 장사꾼은 부끄러움에 남한강에 다시는 배를 띄우지 못했다.”

이익과 의리 사이에서 망설임도 없이 이익을 택하였던 장사꾼은 나중에 부끄러움 때문에 한양으로 향하지 못했다. 이미 돈 쪽으로 추가 기울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편집=강동휘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