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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우리 역사 우리 문화-정읍사공원] 천년의 기다림, 백제 여인의 애절한 望夫歌 <망부가>

백제시대 행상 떠난 남편
기다리다 돌이 된 여인
매년 ‘정읍사문화제’ 개최
여인과 남편의 순애보 기려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유서 깊은 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한다. 역사가 깊은 만큼 문화 또한 찬란하다. 오늘날 세계에서 인기가 높은 K컬처의 저변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자리한다. 신년 기획시리즈 ‘우리 역사 우리 문화’에서는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전국의 명소를 소개한다. 오늘의 관점에서 문화와 역사를 재조명하고 문화콘텐츠로 자리잡은 다양한 면모 등도 살펴볼 예정이다.

기다림. 기대와 낙망.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기다림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살다보면 많은 것을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삶은 곧 기다림이자, 기다림은 삶을 완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제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 차가 막차라면 기다림은 무엇보다 간절해진다. 정류장에서 꼬박 차를 기다리다 허탈하게 돌아서본 사람은 안다. 그저 오고가는 버스가 단순한 통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이 아파 병원을 찾은 이는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초조한 시간을 보낸다. 혹여 중병에라도 걸렸다는 진단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물밀 듯 스치고 지나갈 테다. 그뿐인가. 수차례 취업에 낙방한 취업준비생은 매번 서류를 접수할 때마다 합격 통보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한다. 사랑에 빠진 이는 오지 않는 연인의 전화를 기대하며 벨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매 순간순간이 기쁨이며 절망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은 이렇듯 기다림의 연속인지 모른다.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를, 만약 그 누군가가 가족이라면 그 기다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으로 전이된다. 기다림이 영영 실현되지 않았을 때, 가슴속 회한으로 남게 된다.

시대는 백제시대. 정읍현에 거주하는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에게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다. 고을을 돌며 행상으로 생계를 꾸리는 남편은 순박한 사람이다. 그런데 시골장에 간지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여인은 마을 뒷산에 올라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다린다.

밤이 깊도록 남편은 돌아오지 않는다. 가끔씩 어둠 너머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구름에 가려진 달빛으로 사방은 칠흑의 어둠뿐이다. 혹여 남편이 강도를 만나 몸은 상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들짐승, 산짐승에게 해(害)를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렇게 오매불망 남편을 기다리던 여인은 어느 순간 망부석이 되고 만다.

 

 

정읍사공원에 들어서면 그 백제 여인의 애절한 기다림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다. 설화이기도 하고 노래이기도 한 ‘정읍사’는 오랫동안 구전되어 왔다. 만남과 헤어짐이 옷깃 스치듯 가볍게 치부되는 시대에 백제 여인의 절절한 망부가(望夫歌)는 적잖은 여운을 준다.

5000여 평 공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읍사’를 이야기로 엮어 세운 조형물이다. 철판에 새겨진 여인의 모습을 통해 전체 서사를 가늠할 수 있다. 시린 하늘 겨울 바람이 불어오는 낮은 언덕에 세워진 형상은 마치 설화를 넘어 현존하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고려사’에 나오는 ‘정읍’이라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읍은 전주의 소속현이다. 고을 사람이 행상(行商)하러 나간 지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아 그의 처가 산봉우리 돌 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면서 그의 남편이 밤에 여행하다가 살해당하지 않았을까 염려하여 그 말을 진흙물에 몸이 더러워진다는 표현으로 노래를 지었는데 세상에서는 등점망부석(登岾望夫石)이 있다고 전한다.”

‘정읍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 외에도 ‘악학궤범’, ‘무고’에도 전한다. 학계의 견해에 따르면 ‘정읍사’는 백제의 노래인 것은 분명하지만 고려속요와 함께 불리어진 탓에 원래의 모습에서 다소 변질됐을 것으로 본다. 고려속요에서 흔히 보여지는 후렴구가 있는 것은 그러한 차원에서 볼 수 있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모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떠올라 멀리 멀리 비춰 주소서. )

학창시절 시험공부를 위해 외웠던 문구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사람이 돌로 변할 수 있다는 설화는 강렬하면서도 애잔한 울림을 안겼다. 정읍사공원 언덕을 오르며 기다림의 고통을 잠시 생각했다.

 

 

1994년 정읍시에서는 망부상 서편 기슭에 사우(祠宇)를 건립했다. 그리고 백제 여인의 영정을 봉안했다. 백제 여인과 남편의 순애보를 기리기 위해 매년 정읍사문화제가 열린다. 인근에 정읍시립미술관과 정읍문화예술회관이 있어 문화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문화와 예술을 즐기고 난 뒤에는 정읍사공원에 들러 옛사람들의 러브 스토리를 접한다.

언덕을 향해 오르는 동안 문순태 작가의 소설 ‘정읍사-그 천년의 기다림’의 한 구절이 오버랩된다. “기다림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기다림이란 절망 속에 피어나는 희망의 꽃과 같다. 그러므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가 있다. 사랑받을 수 있다.”

곧 기다림은 사랑이다. 사랑하기에 기다리고, 모진 시간과 세월을 감내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얼마나 기다렸던가. 언덕에 오르자 이편을 바라보는, 아니 멀리 저편을 응시하는 한 여인과 마주한다. 망부상이다. 여인의 깊은 눈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 더욱이 그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천년을 넘어 이어지는 애닯은 사연에 그저 옷깃을 여밀 뿐이다.

새해가 밝은지 또 며칠이 지났다. 올 한해 우리는 무언가를 기다리며 저마다 1년을 보낼 것이다. 한해의 끝자락에 이르러 돌아보면 1년의 모든 시간이 기다림 속에 수렴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기다림 가운데는 절체절명의 순간도 있을 것이며, 빙그레 미소를 짓게 하는 시간도 있을 것이다. 물론 속절없이 모든 것이 허망하게 끝나버리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백제 여인은 말한다. 그럼에도 사랑은 기다리는 것이라고.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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