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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우리땅 '간도'를 청나라에 넘기고 철도부설권 챙긴 일제

백범흠 한중일 협력사무국 사무차장 (연세대 겸임교수)

 

 

백두산정계비에 새겨진 '토문강 경계' 해석놓고 조선-청나라간 이견
조선의 외교권 뺏은 일본, 자국 이익위해 청나라의 일방적 주장 인정
서압록강 유역도 일제가 세운 '만주국'에 속했다가 중국 땅으로 편입


1644년 1월 서쪽 이자성의 순군(順軍)과 동쪽 청군(淸軍)이라는 양면 공세에 직면한 명(明)의 종말이 다가왔다. 3월 초 순군이 페스트(黑死病) 확산으로 인해 많은 주민이 죽어나간 베이징에 육박했다. 순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 난징 재천도는 검토할 수조차 없었다. 순군은 3월18일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베이징에 입성했다.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금성 뒤편 매산(경산)에서 목을 매었다.

# 명나라의 종말과 청나라의 부상

산하이관의 명나라 랴오둥 사령관 오삼계는 장병과 주민 50만여명과 함께 베이징 방어를 위해 진격해 오던 도중 롼저우(탕산)에서 베이징 함락과 숭정제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삼계는 순이 아닌 청을 택했다. 청의 산하이관 입관(入關)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뤄졌다. 청제국에 인질로 잡혀있던 소현세자도 청나라 실력자 도르곤의 요구로 조선인 팔기를 이끌고 청군의 산하이관 입관과 베이징 입성 행사에 참가했다. 오삼계가 이자성의 순에 항복했더라면 순과 청이 병립해 중국과 만주는 분리됐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과 몽골은 만주의 속국이 됐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구가 적은 만주(150~200만 명)는 조선(700만여 명)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주족은 결국 조선에 동화됐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1637년부터 1895년까지 258년 간 황제이자 대칸(大汗)이 지배하던 청제국의 속방이었다. 조선은 자주를 누리는 독립국이기도 했다. 한족(漢族)은 나라조차 없었다. 조선과 청제국은 19세기 말~20세기 초까지도 두만강 북안(北岸) 간도(間島) 영유권을 놓고 다퉜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제국이 1909년 청제국과 맺은 ‘간도협약'으로 인해 간도는 청제국령, 이어 중화민국령이 됐다. 압록강 유역 단동시 펑황(鳳凰)까지의 영유권 문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압록강은 우리가 압록강이라 부르는 동압록강 본류와 함께 혼강(비류수, 파저강 등)이라고 부르는 서압록강 지류가 있다. 1388년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威化島)는 압록강 본류에 위치한, 우리가 잘 아는 위화도가 아니라 그곳에서 서북방으로 30㎞ 떨어진 서압록강, 즉 혼강 중하류 랴오닝성 관전현 서점자 지역에 있다. 서점자는 3개의 물길이 마주쳐 반도를 형성한, 안동 하회나 예천 회룡포와 유사한 지형의 땅이다.

# 조선과 청나라의 ‘간도' 영유권 분쟁

청제국이 중국 본토를 점령한 후 조상의 발상지라 하여 백두산 좌우 압록강과 두만강의 만주지역 40~50㎞까지를 봉금(封禁), 공한지(空閑地)로 설정했다. 17세기 말~18세기 초 조선인의 청제국 관리 습격과 주민 살해 등 조·청 간 종종 분쟁이 일어났다. 1712년(숙종 38년) 청제국은 조선인들의 범죄를 구실로 만주족이 성지(聖地)로 여긴 백두산을 청제국 영토 안에 포함시키려는 의도로 백두산 국경 획정(劃定) 계획을 세웠다. 청은 측량을 위해 지린총독 목극등을 보냈다. 조선은 접반사 박권, 함경감사 이선부 등으로 하여금 목극등과 함께 백두산 지역을 측량케 했다. 이들은 늙었다는 핑계로 동행하지 않고, 접반사 이의복과 순찰사 조태상, 역관 김응헌 등 6명만 동행해 목극등의 요구대로 정계비 위치를 정했다. 백두산 정상 동남쪽 약 4㎞ 지점(해발 2,200m)에 조·청 국경을 정하는 정계비가 세워졌다. 정계비에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경계를 정해 분수령에 비를 세운다(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토문강'이 두만강(豆滿江)을 말하는 것인지, ‘투먼장(토문강·土們江)'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아 논란이 됐다. 1885년(고종 22년)과 1887년 서북경략사 어윤중은 청나라 관리와 회동, 정계비문 해석을 놓고 논의했는데, 현지답사 결과를 기초로 투먼장 동쪽에 위치한 간도가 조선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토문감계사로 파견된 안변부사 이중하 역시 1885년 1차 회담에서 정계비 해석상 두만강과 투먼장은 다른 강이라고 말했다. 1887년 2차 회담에서 이중하는 조·청 국경선으로 백두산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두만강 상류 홍토수선을 주장한 반면, 청나라 대표는 양강도 삼지연시 북쪽 북포태산(北胞胎山)에서 발원하는 두만강의 지류 홍단수선에 이어 그 남쪽의 석을수선을 조·청 국경선으로 수정 주장했다. 조선이 청의 논리를 압도했다. 이은 1888년 3차 회담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조선은 1903년 투먼장 이동, 두만강 이북 간도지역 조선인을 보호하고자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했다.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외교권을 빼앗은 지 2년 뒤인 1907년 8월 용정(龍井)에 파출소를 설치, 간도가 일본의 보호령인 조선 영토라는 의사를 명확히 했다. 하지만 일본은 1909년 9월 청나라로부터 남만주철도(뤼순-창춘) 부설권을 보장받는 등의 대가로 정계비에 대한 청의 해석을 인정하는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간도협약 제1조는 ‘청·일 정부는 두만강을 조·청 경계로 하고, 정계비로부터 석을수를 잇는 선을 국경선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은 쑹화장(松花江) 상류인 투먼장이며, 간도가 조선 땅이라는 사실은 무시됐다. 한편 홍콩 반환 이전인 1982년 중국의 덩샤오핑은 영국이 1842년 난징조약에 의거, 영구 할양받은 홍콩섬(80㎢)과 주룽반도(47㎢)를 제외한 99년 기한 조차지(租借地) 신계(976㎢)만 반환하겠다고 말하자 “제국주의 시대 중국과 체결된 모든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덩샤오핑 선언을 원용하면 제국주의 시대 청·일 간 체결된 간도협약 역시 무효다. 2차 대전 종전 시 만주를 점령한 소련은 1948년 2월 북한과 간도 조선인 자치구 설립을 골자로 한 ‘평양 협정'을 체결했다. 소련은 간도 전체를 ‘자치공화국(SSR)'으로 만들어 북한에 편입시키려고도 했다. 1962년 10월과 1964년 3월 체결된 조·중 국경조약과 조·중 국경조약 의정서에 의거, 백두산 천지(天池)의 54.5%가 북한에 속하게 됐다. 백두산 부근만은 홍토수 선을 따라 국경선이 그어졌다.

#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는 어디인가

서압록강(혼강) 유역 영유권 문제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는 우리가 아는 위화도에서 서북방 만주 쪽으로 30㎞ 떨어진 서압록강, 즉 혼강 중하류 랴오닝성 관전현 서점자에 위치해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압록강 너머 180리(72㎞)까지 공한지(空閑地)이다. 랴오둥의 연산(連山) 파절(군부대 주둔지)까지 가야 명나라 초병이 보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480년 이전까지 압록강 서안(西岸) 180리까지의 땅은 명나라 영토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펑황 부근 책문(柵門)이 청나라 동쪽 국경이었다 한다. 1715년(숙종 41년) 헤이룽장성을 관할하는 청나라 잉고타(寧古塔) 장군의 두만강 인근 군(軍) 막사 설치, 1731년(영조 7년)과 1746년(영조 22년) 랴오닝성을 관할하는 선양 장군의 검문소 설치와 함께 책문을 압록강 쪽으로 이전하려는 시도 등이 조선의 끈질긴 이의 제기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다. 조선 후기까지 많은 조선인이 압록강 본류 서안(西岸) 조·청 공유지(Condominium)에서 농사를 지었다. 압록강 서안 공유지는 19세기 들어 청제국의 영향력이 조선을 압도하면서 청제국 영토로 굳어졌다. 이 지역은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이후 일본의 위성국인 만주국 영토가 됐다가 2차 대전 후 중화민국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 영토가 됐다. 16세기 이순신이 활약한 두만강 하류 하중도(河中島) 녹둔도(鹿屯島)는 19세기 큰 홍수로 인해 두만강 하류 흐름이 바뀌면서 함경북도 반대(러시아)편에 붙어 1860년 베이징 조약에 따라 러시아령이 되고 말았다.

# “성리학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나라”

‘주자(朱子)의 나라' 조선은 15세기와 18세기 간 경계를 그리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이 없었다. 성리학만을 진리로 고수한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는 1709년 보령 한산사(寒山寺)에서 인성(人性)·물성(物性) 동질 여부에 대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주도했다. 호락논쟁은 훗날 노론이 인성·물성 간 이질성을 강조한 벽파(僻派)와 인성·물성 간 동질성을 강조한 시파(時派)가 갈라지는 계기가 됐다. 호락논쟁은 오랑캐 만주족도 문명을 이룩할 수 있느냐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시골지역 충청도 ‘호(湖)'를 대표한 한원진과 달리 도시지역 서울과 그 주변 ‘락(洛)'을 대표한 이간은 오랑캐도 문명을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세기 흑인 노예 해방 전후 백인들 간 종종 했다는 ‘흑인도 영혼이 있나, 없나'와 비슷한 수준의 논쟁이었다. 이간의 영향을 받은 박지원과 홍대용 등을 중심으로 청나라에서 배우자는 북학운동이 일어났으나 북학파 역시 성리학의 테두리를 뛰어넘지 못했다. 영조는 청나라에서 가져온 망원경과 세계지도 등을 파훼했다. ‘계명군주' 정조는 성리학 이외 모든 학문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노예제도 역시 근본적 변화없이 유지됐다. 이미 명나라 시대 주류였던 양명학조차 조선에서는 19세기가 돼서야 제대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조선은 맹목의 노론 산림(山林)이 국가경영을 주도하는 가망 없는 나라가 됐다. 일본은 1641년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出島) 등을 통해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유럽과 교류했다. 이에 따라 19세기 중반 이미 근대화를 준비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다.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에도(도쿄)의 도쿠가와 막부에 12차례나 통신사(전쟁포로 쇄환사 3회 포함)를 파견했으나, 1763년 조엄이 도입한 고구마 이외 제대로 배워 이행한 것이 없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 일본은 이미 상하수도와 출판, 망원경 제작 기술, 외과수술 능력을 갖고 있었다. 조선 통신사들은 베이징조차 에도와 오사카의 번영에는 미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열하일기에 앞서 일본(해동)일기가 나왔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에 세뇌된 통신사들은 일본을 야만 오랑캐로 간주했다. 통신사들은 성리학적 시각에서 에도와 오사카의 번영을 ‘오랑캐에게 어울리지 않은 사치'라고 규정했다. 일본은 조선을 성리학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나라라고 평가했다. 조선은 일본을 교화시켜야 할 섬나라 오랑캐로, 일본은 조선을 △류큐(오키나와) △아이누(홋카이도와 사할린 포함) △남만(南蠻)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과 함께 조공을 바치는 외번(外藩)으로 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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