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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49) ‘불멸의 애국혼’되살린 논개(論介) 시인, 고두영(高斗永)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시인은 1929년 7월 11일, 전북 장수군 계남면 신전리 1239번지에서 아버지 고봉석과 어머니 배오목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였지만, 주경야독으로 고학하였으며, 경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고향 장수의 초등학교에서 교사, 장학사, 교감, 교장 등으로 40년 넘게 봉직하였다. 시인의 고향 사랑은 아주 특별했다. 『장수군지』를 비롯하여 『장수의 얼 동화집』(공저), 『장수의 표상』(공저) 등을 저술하였고, 장수교육지원청에 근무할 때는 『장수문맥』이라는 학생 문예지를 해마다 발간하여 장수 학생들의 문예 지도에 열정을 보이기도 하였다. 필자가 장수교육지원청에 근무할 때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장수문맥』을 속간(續刊)하고 이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매우 흐뭇해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시인은 주논개의 삶과 행적을 추적하여 ‘불멸의 민족혼’을 되살리는 데 앞장섰다.

 

 

시인은 사람들의 희미한 기억 속에 전해 오는 논개(論介, ?~1593)를 만나면서부터 큰 변화를 가져왔다. 논개의 삶을 추적하여 1977년에는 『이애미 주논개』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는 논개의 생애와 순국 정신이 하나의 정설로 정립되지 않은 점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그 진실성에 접근해 보려는 시인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책은 논개 연구 및 논개 관련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대동아 공영과 내선일체라는 명목으로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서 장수에 전해오는 ‘논개생장향수명비(論介生長鄕受命碑)’를 파괴할 계획이었으나, 장수의 청년들이 미리 알고 숨김으로써 그 수난은 면했지만, 그 앙갚음으로 출생지의 논개 선조 묘와 사적을 없애면서 실 가닥처럼 전해오는 논개의 역사적 사실은 허망하게 증발해 버렸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20일에 이 비석이 발굴되면서 의암사 건립과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시인은 이 무렵부터 사료를 뒤적이며 논개의 가문과 출생, 작명, 효성, 생애, 임진왜란의 거사, 순국 등을 정리하였다. 1972년에는 『장수 절개』라는 책을 펴냈으며, 또한 그의 노력으로 1981년 KBS ‘생방송 전국 일주’ 프로그램에 ‘논개의 생가터’가 소개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특히, 당시 대통령이 관심을 가짐으로써 시인은 청와대를 두 번이나 방문하여 브리핑함으로써 생가복원과 성역화 사업을 끌어냈다.

 

죽음에서 태어난 그 이름이여 !

햇빛에 떠오르면 정사가 되고

달빛에 잠기면 야사가 되거늘

햇빛 달빛도 비켜서 버린

외로운 이름이여.

 

이젠

꽃빛 불빛으로

민중의 가슴 속 화석으로 새겨진

의낭루에 불사조로 살아난

구원의 여신

거룩한 이름이여

그 이름이여!

 
「그 이름 의낭(義娘) - 논개」 (전문)

 

 

시인은 여러 편의 시를 통하여 논개의 삶과 애국정신을 기렸다. 어쩌면 시인의 문학은 논개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국난의 위기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린 논개의 애국 충혼을 생각하면서 한없이 가슴이 뜨거워졌음을 그의 시편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정사와 야사에서도 버림받은 논개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각별했다 “더운 피가 붉다 하되 임보다 진할쏜가/ 진주 남강 푸른 물결 임보다 푸를 쏘냐 / 조국 향한 우국단충 원수 왜장 수장했네 /논개님의 애국충정 겨레에 불 밝혔네.”(「논개님의 액국단충」 중 일부)라며 논개의 애국 충절을 기리고 일깨웠다.

 

 

 

시인은 퇴직 후에도 고향에 살면서 장수의 문화적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하였다. 장수문인협회 회장과 장수문화원장을 역임하면서 장수의 문학과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시작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시인은 총 8권의 시집을 냈으며 노년에 쓴 『들플의 향기』와 『들풀의 소살거림』은 일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로 고향의 평화로운 정경과 온후한 시골 사람들의 삶을 정겹게 그려냈으며, 또한,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점차 피폐화되어가는 고향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50년대 50여 호 되던

산골 요촌이

도시로 하나 둘 떠나가고

눈 덮인, 쓸쓸한 고샅길

고추바람만 오락가락

 

사람들이 사는지 마는지

말 물어볼 인적도 없이

죽음의 고요가 장막을 치고

 

깊어 가는 밤

촌로들이 깜빡이던, 등불

하나 둘 꺼져 가면

빈집의 적막, 검은 불 켜 들고

언젠가는 마을의 씨 불 다 꺼진 날

한촌의 텅 빈 마당

찬바람이 판을 치겠지

 

「한촌」의 전문

 

시인은 여러 권의 시집을 내면서도 늘 부끄럽고 두렵고 쑥스럽기 그지없다고 고백한 바 있다 시인의 말대로 애써 모은 작품들을 버릴 수 없고 하여 마치 다신 정약용 선생의 「노인 일쾌사」를 떠올리면 만용을 부렸다고 겸손해했다.

 

타향에서 떠돌이 별로 흐르다

오갈 길 막장에 부딪혀

흐르는 별이 줄을 긋는다

 

흙바람 사납게 불고

돌멩이가 날고 구르는

눈뜨고 바로 서기 힘든

흙무덤에 한 몸 부려놓고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리

 

떠난 후 그럴 일 없으려니와, 혹시나

그 뉘 찾거든

옛 고향 찾아갔노라 이르고

언제쯤 오느냐고 묻거든

먼 나라로 이사 갔노라 말해주오.

 

아아,

언젠가는 꼭 돌아가야 할

그 고향길

웃고 갈 수 있는

편안한 길이었으면 좋으련만

 

「고향길」 전문

 

이 시에는 사모님을 여의고 홀로 지내면서 쓴 시로 ‘근원적인 고향’으로 돌아가야 함을 내비치고 있는 시다. “그 뉘 찾거든 / 옛 고향 찾아갔노라 이르고 / 언제쯤 오느냐고 묻거든 / 먼 나라로 이사 갔노라 말해주오‘에서는 언젠가는 가야 할 이승의 마지막을 늘 생각하였던 것 같다.

시인은 늘 따뜻하고 다정다감하였다고 한다. 시인의 자녀들은 항상 온화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이끌어주신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으며, ’최선의 자아실현’을 가훈으로 삼고 늘 강조하였다고 했다.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기고 desk@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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