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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율곡에게 길을 묻다]스물셋 이이, 쉰여덟 이황 선생에게 가르침 청하려 찾은 안동 계상학림

율곡과 퇴계의 역사적 만남

 

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 퇴계종택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268에 위치해 있다. 그 퇴계종택 앞을 흐르고 있는 작은 시내 건너편에 퇴계 선생이 제자를 가르쳤던 작은 집 계상학림(계상서당)이 있다. 바로 율곡과 퇴계가 만난 역사적인 장소다.

율곡은 금강산을 내려와 1년여를 강릉에 머물다가 다음 해 한양으로 올라가 곧바로 한성시(漢城試)에 장원급제한다. 그리고 22세가 되던 1557년 9월 성주목사 노경린(慶麟)의 딸인 곡산(谷山) 노씨와 백년가약을 맺게 된다. 가정을 꾸리게 된 율곡은 이듬해인 1558년 봄, 부인 노씨와 강릉 외할머니를 찾아뵙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강릉으로 가는 길 중간에 안동 예안에 들러 퇴계 이황 선생을 찾아뵙고 학문을 묻는다. 약관 23세의 율곡과 58세의 퇴계의 만남은 오늘날 '퇴율학'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한국 유학사의 양대산맥으로 평가받는 두 유학자가 주일무적(主一無適)과 사물을 응접(應接)하는 요령을 주고받았으며 서로 대단히 감동했다. 그 감동은 고스란히 시로 남겨져 전해진다.

먼저 율곡이 청빈한 살림뿐이지만 달빛 비추는 호수 같은 퇴계 선생에게 도를 청하는 시구를 던진다.

학통은 수사(洙泗)의 공자로부터(溪分洙泗派·계분수사파)

빼어난 무이산(武夷山) 주자이구나(峯秀武夷山·봉수무이산)

살림이란 경전 천권뿐이요,(活計經千卷· 활계경천권)

행장(行藏)은 두어 칸 모옥뿐이로다.(行藏屋數間·행장옥수간)

가슴속은 환히 개인 달 같고(襟懷開霽月·금회개제월)

담소는 미친 물결을 그치게 하네.(談笑止狂瀾·담소지광란)

이 젊은이는 도를 듣기 원하니(小子求聞道·소자구문도)

반나절 한가로움 훔친다 마소.(非偸半日閒·비투반일한)

먹물 냄새 그윽한 고서들만 가득 들어있는 두어 칸 옛집에 신선처럼 앉아있는 퇴계 선생이 달빛처럼 무심히, 호수처럼 담담히 느껴졌을 것이다. 그 심정을 그대로 시로 읊으며 이 몸은 도를 구하고자 여기까지 달려왔으니 반나절 한가로움을 방해한다고 귀찮아하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그것을 받아든 퇴계 또한 청년 율곡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거니와 그 고매한 뜻을 이어가길 당부하는 화답의 시를 낸다.

여기 갇혀 봄도 맛보지 못했더니(病我牢關不見春·병아뢰관불견춘)

공이 와서 내 정신 맑게 해주는구려.(公來披豁醒心神·공래피활성심신)

명성 높은 선비 헛 없음을 알겠으니(始知名下無虛士·시지명하무허사)

지난날 내 학문 적음이 못내 부끄러워라 (堪愧年前闕敬身·감괴년전궐경신)

가곡은 돌피 익어 화려함 용납하지 않으며(嘉穀莫容梯熟美·가곡막용제숙미)

먼지는 거울이 닦여 새로워짐을 허락지 않는다오.(游塵不許鏡磨新·유진불허경마신)

지나친 시의 말 모름지기 깎아 버리고(過情詩語須刪去·과정시어수산거)

노력하여 날로 학문이 새로워지시구려.( 努力功夫各日親·노력공부각일친)

단 2일간의 만남이었지만 인생의 황혼기로 꺼져 가는 등불이었던 퇴계는 율곡에게 미래를 당부한 것이다. 그것이 학문이든, 나라이든 위대한 학자이자 혜안을 가진 선지자들끼리의 암묵적인 신뢰와 지지로 다음 세대를 당부한 것이다. 그리고 율곡은 퇴계와 평생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했다. 인생이 막막하고 어찌할지 모를 때 퇴계 선생에게 자문을 구해 나아갈 바를 정했다.

퇴계가 1570년 12월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이황의 행장(行狀)이 없다는 이유로 증직해 주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여러 신하가 퇴계 선생의 시호(諡號)를 내릴 것을 청했으나 임금은 뚜렷한 업적이나 국가적으로 세운 공과 같은 행장이 없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율곡은 “이황(李滉)의 행적은 환하게 귀로 듣고 눈으로 보신 것이니, 그 행장의 있고 없음이 어찌 더하고 감함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죽은 어진 이에게도 포장해 높이시기를 주저하시는데, 하물며 지금 살아 있는 선비들에게야 어찌 그 착한 것을 좋아하시는 정성이 있겠습니까. 이황의 시호는 비록 1∼2년을 지체한다 하여도 오히려 큰 해가 없겠사오나 사방에 있는 선비들이 전하께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없지 않으신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면, 그 해가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율곡의 이와 같은 주청에 선조는 하는 수 없이 퇴계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게 된다. 율곡과 퇴계의 이 만남이 두고두고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이런 인간적인 도의(道義)의 만남 때문인 것이다.

글=조상원기자·사진=권태명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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