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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안용복에게서 독도를 배우다

동료 박어둔과 울릉도 조업 나서
일본 어부에게 강제로 끌려가

해당 글은 비교적 사료에 기반해 작성하되,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여러 학자들의 추측으로 채워넣었음을 미리 밝힌다. 편집자 주.

 

①독도를 지켜낸 '안용복 바로 알기' 전문가 좌담회

②독도수호일지-일본으로 끌려간 안용복

③독도수호일지-일본과 한국의 소리없는 싸움

④독도수호일지-또 다시 일본으로…독도를 취하다

⑤독도수호일지-한국의 영웅·일본의 허풍쟁이

 

 

"이보오 박어둔 동지. 이번에 울릉도로 같이 안가보겠소"

 

질문을 던진 사내는 덩치가 몹시 컸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와 울퉁불퉁한 힘줄이 사내를 더욱 거대히 보이도록 했다.

 

사내, 즉 안용복은 마마자국이 성근 콧등을 찡그리고는 나직히 말했다.

 

"이번에 우리 객주 어르신이 손을 써서 겨우 승낙을 받은거요. 요즘 왜놈들도 섬에서 종종 눈에 띈다길래 울릉도가 우리 섬이란 문서를 가지고 갈건데 내가 까막눈이니 글을 아는 박 동지가 함께 가야 안심이 될 것 같소"

 

당시 조선은 태종 때부터 200년이 넘도록 공도정책을 시행해 왔다. 먼 바다를 건너가다 사고를 당하는 어민들이 많고, 왜구도 적잖이 침범하니 아예 섬을 비울 속셈이었다.

 

당연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섬들은 곳곳에 산삼이며 해산물이 넘쳐났고, 그런 기회를 노려 몰래 섬에서 채취활동을 하던 사람들도 서서히 늘어나는 시기였다.

 

개성상인 오충추의 밑에서 일하던 안용복 역시 산삼과 전복 채취 등을 위해 일찌감치 함께 갈 사람들을 모으던 터였다.

 

"정말 안전한게 맞겠지요? 그렇다면 나도 좀 끼워주오. 전복은 물론이고 혹시나 산삼이라도 한뿌리 캐오면 없는 살림에 숨통이 좀 틔일께 아닌가"

 

박어둔의 대답에 안용복은 자신의 가슴을 탁 치며 자신있게 말했다.

 

"알겠소. 그러면 오는 그믐에 포구로 오시요. 대신에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되오."

 

1693년 2월 21일. 동래포구에 모인 어선 5척이 50여명을 태우고 뱃길을 떠났다.

 

약 한달 간의 항해 끝에 울릉도에 도착한 그들의 눈에 금새 번갯불이 튀었다.

 

여기저기 놓인 어구들과 창고의 모양새를 보니 벌써 오랫동안 일본 어민들이 드나든 흔적이 분명했다.

 

'이놈들이 남의 땅에 들어와서 주인 노릇을 하는구나'

 

도착한 어민들 사이에서 분통에 찬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어민들은 놓여진 일본 어구들을 걷어차고, 일본에서 말려놓은 전복들을 몽땅 배에 실은 뒤 몇몇은 산으로 가고, 또 몇몇은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만약 일본 어민들이 들이닥치면, 상인으로 왜관을 드나들어 서툴게나마 일본어가 조금 가능한 안용복과 한문을 알던 박어둔에게 먼저 연락하기로 사전에 약속이 된 터였다.

 

약 보름 간 조업활동을 하던 조선어민들에게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다. 저 멀리서 일본의 것으로 보이는 배 2척이 울릉도를 향해 곧바로 다가왔다.

 

일본 어민들이 떠드는 소리에 얼릉 안용복과 박어둔이 뛰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80년 전 울릉도를 두고 대마번주가 서명한 양국 간 영토 확인 문서가 들려 있었다.

 

 

이들이 올라타자 일본 어민들은 곧장 험악한 소리를 쏟아 냈다.

 

대충 들어보니 '왜 남의 땅까지 와서 어구까지 훼손하는 등 행패를 부리느냐'는 강짜 같았다.

 

안용복도 떠듬떠듬했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봐라. 대마번주가 울릉도는 일본에 속한 섬이 아니라는 문서가 있다. 네 놈들이야말로 왜 남의 땅에 와서 난동을 부리느냐"

 

그러자 일본 어민들은 코웃음치며 오히려 다른 문서를 내밀었다.

 

"대마번주라고? 겨우 지방 관리가 뭘 아느냐. 우리는 여기 막부 노중(최고 대신)이 울릉도 전복 채취를 허가한 증서가 있다"

 

두 나라 어민들이 암만 비교해보아도 문서를 알아볼리 없다. 일본의 한자와 한국의 한자가 아예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 어민들은 답답한 듯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말이 안통한다. 그렇다면 이놈들을 끌고가 번소에 상소하고 어떻게 주둥이를 놀리는지 보자"

 

안용복과 박어둔이 '어, 어'하는 사이에 팔뚝이 붙잡혔다. 배는 순식간에 닻을 올려 일본으로 선수를 돌렸다.

 

안용복 등은 그저 혼이 나갔을 뿐, 자신들 앞에 8개월 간에 걸친 기나긴 시련이 놓여있음을 이때는 아직 알지 못했다.

 

신동우 기자 sdw@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