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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5)]섬마을, 금싸라기 땅이 되다

신공항 들어선다… 풍문만으로 들썩였던 섬, 돈잔치가 끝나고… 모두가 행복하진 못했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 "매립 공항 건설"
교통부 부인에도 외지인 몰려들어 투기
그해 1분기에만 땅값 70% 넘게 올라가
개발정보 유출·대기업 소유 등 의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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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6월 인천국제공항 건설이 확정됐을 때 작은 섬마을이던 영종도·용유도·삼목도·신불도는 순식간에 금싸라기 땅으로 바뀌었다.

 

 

물론 그 몇 년 전부터 소문이 돌면서 이미 땅값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인천국제공항 건설사업을 계획한 일정과 예산에 맞춰 원활하게 진행하려는 '정부'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과 바다를 그냥 내어줄 수 없다는 '주민' 간 보상문제를 둘러싼 팽팽한 줄다리기가 10년 넘게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투기꾼들'까지 가세하면서 영종도에는 욕망이 들끓는 부동산 광풍이 휘몰아쳤다. 그 속에서도 마을 공동체를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정부가 대형 국책사업을 추진할 때 가장 큰 사회적 관심거리이자 걸림돌은 보상문제이다. 오죽하면 왕이 통치하던 조선시대에도 철거 보상이 있었다. 

 

서울역사편찬원이 '경복궁 영건일기'(19세기 말·일본 와세다대학 소장)를 토대로 지난해 12월 펴낸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을 보면, 1865년(고종 2년) 4월 한성부가 경복궁 주변 기와집 85칸, 초가집 592칸, 임시가옥 10칸 반에 한 칸당 각각 10냥, 5냥, 2냥씩 철거 보상금을 지급했다.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무상으로 몰수할지를 두고 토론이 있었으나, 결국 보상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때부터 이듬해까지 경복궁을 둘러싼 기와집 1천872칸, 초가집 2천553칸, 임시가옥 77칸 등 총 4천502칸에 달하는 민가가 보상금을 받고 철거됐다. 

 

당시 경복궁 중건사업을 위해 전국에서 거둬들인 돈은 83만4천266냥이었는데, 이 가운데 4%인 3만3천833냥을 보상비로 썼다.

 

1865년 경복궁 공사에 참여한 담모군(일꾼)과 장인(기술자)은 역할에 따라 하루 품삯으로 2.5~4전을 받았다. 당시 화폐 단위로 10전은 1냥이다.

인천국제공항 건설과 경복궁 중건은 당시 국가의 새로운 동력을 찾기 위한 최대 건설 프로젝트였다. 둘 다 그만큼 시급하고 절실했다. 이들 프로젝트 모두 사업대상지의 주민 협조가 필수 불가결한 과제였다.

인천공항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총 5천619만㎡ 부지가 필요했다. 대부분은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바다를 매립해 확보했고, 보상이 필요한 사유지는 944만5천㎡로 계획됐다. 

 

영종·용유지역 일부에 삼목도와 신불도 전체를 포함하는 면적이다. 바다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주민들의 어업권 보상도 이뤄졌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전신 격인 한국공항공단(현 한국공항공사)은 1991년부터 2001년 2월까지 10년 동안 단계적으로 토지 보상을 진행했다. 

 

 

이 기간 총 보상금은 2천686억원인데, 워낙 장기간에 걸쳐 집행했기 때문에 물가와 부동산 가격 상승 등을 고려하면 액면 그대로 보상금 규모를 환산하기는 어렵다.

한국공항공단이 공식적인 보상절차에 돌입하기 전부터 영종도·용유도·삼목도·신불도에는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불었다.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면, 인천시 순시에 나선 노태우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도화선이 됐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 3월 8일 새해 연두방문 차원으로 인천시청을 찾아 "수도권 지역의 제2국제공항을 인천의 영종도나 인근 바다 매립지에 건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1990년 6월 교통부의 확정 발표가 있기 무려 1년 3개월 전이다.

교통부는 노 대통령이 언급한 지 이틀 만에 '영종도 공항설'을 부인했다. 그러나 대통령 발언 직후 하루 수백명의 외지인이 영종도로 몰려들어 땅을 사들였다. 

 

속칭 '떴다방'(불법 임시 중개시설)이 성행하면서 '가짜 개발 구상도'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1989년 6월 각종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그해 1분기 영종도와 용유도 땅값은 전년도 4분기보다 70.42%나 급등해 전국 최고 수준의 오름세를 보였다. 

 

이때 서울 강남구 땅값이 전년도 4분기보다 30.97% 오른 것에 비하면 가히 폭발적이다. 1990년 8월 평화민주당 토지투기조사위원회는 영종도와 용유도 전체 토지 가운데 73%가 외지인 소유라고 주장하며 개발정보가 사전에 유출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대기업 소유라고 평민당은 주장했다.

주민들 대책위 꾸려 공단과 협상 나서
공유수면 매립 어업권도 단계적 보상
어선사재기 횡행·"금액 적다" 소송도


영종도 일대 섬 주민들도 1990년대 들어서 섬별, 마을별로 보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한국공항공단과의 보상협의를 준비했다. 

 

정부는 공시지가보다 다소 높은 보상금을 제시했지만, 주민들은 실거래 가격보다 터무니없이 낮다고 반발했다. 

 

경인일보 1992년 1월 4일자 신문을 보면, 영종도 운서동 주민들은 "공항부지 중 외지인 소유 43필지 12만여평의 평당 보상가 4만~5만원은 주민들 사이에 형성된 임의시가 10만원 선의 절반에 못 미친다"며 "교통부가 현지 주민들은 제쳐 두고 현실감이 덜한 외지인을 대상으로 우선 보상협의에 나선 것은 계략"이라고 반발했다.

삼목도 쪽 인천공항 기공식 부지도 주민 반발에 확보하지 못하고, 결국 1992년 9월 개최하려던 인천공항 기공식이 11월로 미뤄지기도 했다.

 

1996년 5월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 기공식에 주민대표로 참석한 강영복(85)씨는 김영삼 대통령 바로 옆에서 함께 발파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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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복 씨는 "김영삼 대통령이 '보상 잘 받았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잘 못 받았다고 대답했다"며 "대답을 들은 대통령이 주민들을 더 챙기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보상협의 과정은 어땠는지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삼목주민보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유건호(63) 중구농협 조합장에게 들어봤다. 그의 가족은 6대째 삼목도와 영종도에서 살고 있다. 

 

 

유건호 조합장은 "주민보상대책위가 13번에 걸쳐 자체적으로 토지 감정평가를 받아서 한국공항공단과 협상을 벌였는데, 처음에는 평당 7만원 부르던 땅을 수십만원까지 올려 보상받았다"며 "땅만 갖고 따지는 게 아니라 농작물, 돼지나 소 같은 가축을 두고도 한바탕 씨름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인천공항 보상이 전국적인 '롤모델'이 됐는지 전국의 국책사업 예정지 주민들이 유건호 조합장에게 '제대로 보상받는 법'을 강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무안국제공항 예정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는 그 지역 경찰서 정보과 소속 경찰관이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압력을 넣을 정도였다고 한다.

인천공항 건설로 섬 전체가 수용되기 전까지 삼목도에는 200여 가구가 살았다. 적게 보상받은 사람이 3천만원, 많게는 100억원 넘게 보상금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삼목도 사람들은 마을 농악계도 활발하고, 자체 장학회도 운영할 정도로 끈끈했다고 한다. 

 

유건호 조합장은 "대책위에 브로커가 끼려고도 했지만, 주민들이 워낙 단결이 좋아서 끝까지 스스로 협상했고 내부 분쟁도 적었다"며 "삼목애향회와 삼목장학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인천공항은 4개의 섬 일대 공유수면을 매립해 건설했기 때문에 어업에도 지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1991년부터 어업 피해 조사용역을 진행하기 시작해 2000년까지 단계적으로 어업권 보상에 나섰다. 보상지역은 영종·용유뿐 아니라 옹진군 북도면 장봉도와 신·시·모도, 강화와 김포 일대까지였다. 

 

바지락, 굴 등을 양식하는 '면허어업' 990억원, 어선과 어구를 이용하는 '허가어업' 197억원, 맨손으로 어패류를 채취하는 '신고어업' 127억원이 보상금으로 집행됐다. 

 

인허가 절차 없이 어업활동을 했던 무면허·무허가·무신고 어업 관련해서도 보상대상으로 선정해 총 242억원을 보상했다. 일부 어민들은 보상금이 낮게 책정됐다며 인천공항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노인 상대 '금전 요구' 협박전화 많아
도박으로 돈 날리고 막노동판 전전도
초기 공항직원과 주민 '미운정 고운정'


어업권 보상을 노린 '어선 사재기'도 적지 않았다. 

 

경인일보 1990년 8월 29일자 신문을 보면, 당시 중구청에 등록된 어선은 영종지역 어촌계 78척, 용유지역 어촌계 141척 등 모두 219척으로 연초보다 30척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주민들은 빚을 내서라도 강화도나 경기도 화성 등지에서 폐선 직전의 어선을 1척당 500만~1천500만원씩 주고 사들였다. 물론 대부분은 조업활동을 하지 않고 정박시켜 놨다.

영종·용유지역 어민들은 보상 대상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보상금이 무더기로 지급됐다고 인천수협 등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인천지검은 1993년 7월 어업 보상 대상자 선정 경위 등을 수사한 결과, 보상금 총 8억5천만원을 중간에서 가로채거나 무자격자에게 지급한 어촌계장 등 5명을 구속했다.

보상받은 주민들이 마냥 행복한 삶을 살진 않았다. 노인들이 사는 집을 골라서 "손주가 어느 학교 다니는지 알고 있다"며 돈을 요구하는 정체불명의 협박전화가 많았다고 한다. 

 

보상금으로 영종도 땅을 다시 사는 주민도 상당수였는데, "건축허가가 나면 땅값이 10배 이상 뛸 것"이라는 사기꾼의 말에 속아 쓸모없는 땅을 수십억원씩 주고 샀다가 빈털터리가 된 사람도 많았다. 

 

50대 영종도 토박이 주민은 "2006년 12월에 2차 토지보상을 받고, 이듬해 설 명절에 안 싸운 집이 없을 정도로 가족·친척 간 갈등이 많았다"며 "보상받고 강원랜드에서 하루에 1억원씩 날리면서도 '잘 놀았다'고 떵떵거리던 주민이 지금은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보상협의 과정에서 정부와 주민 간 오해를 푸는 데는 강동석(82) 전 건설교통부 장관의 역할이 컸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강동석 전 장관은 1994년 출범한 신공항건설공단 이사장으로 취임해 인천공항 건설공사를 주도했고,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초대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을 지냈다. 

 

강영복 씨는 "강동석 장관이 현장에서 직접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어가면서 항상 공단 직원들에게 주민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주문하곤 했다"며 "인천국제공항공사 초기 직원들은 현장에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인지 보상이 끝난 이후에도 무척 가깝게 지냈다"고 말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