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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정달식의 공간 읽기] 탄화 동판 1500장의 정성, 세월 따라 바뀌는 건물의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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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동네가게 녹슨’
세월, 시간 따라 건물이 옷 바꿔 입는 듯
벽과 벽 사이 ‘사이 공간’ 건물 숨통 역할

 

 

그의 건축 작품은 시선을 붙잡는 묘한 매력이 있다. “건축물이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울산을 주 무대로 활동(최근에는 경남, 부산, 경기도 지역까지 작업 범위를 넓혀 나가고 있다)하는 정웅식 건축사((주)온건축사사무소 대표)의 작품은 좀 특별하다. 와이 하우스, 타워 하우스, 클리프 하우스, 닫힌 집 열린 집, 점, 댄스 빌딩…. 그의 예사롭지 않은 여러 작품 중에서도 유독 첫인상에서부터 아주 강렬하게 다가오는 게 있다. 바로 ‘동네가게 녹슨’(이하 녹슨·울산 중구 옥교동)이다. 이 건물을 본 관람객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랬다고 한다. “이게 뭐지.” “충격적이다.” “쉬 접해 보지 못한 건축물.” “공간 구성이 파격적이다.”

 

한 장 한 장 손으로 두들기고 불로 구워

노랑→갈색→검정→청록색으로 변화

나무 픽셀 등 정성과 공력의 결정체

‘사이 공간’ 빛 유입, ‘숨통’ 역할 탁월

 

 

■(시간을)만나고, (정성을)더하다

 

녹슨(NOXON)은 대지면적 111㎡에 연면적 131. 34㎡인 지상 3층 구조의 아트숍 겸 카페다. ‘녹슨’은 외형적으로 드러난 건물의 모습을 대신한다. 건물 모습과 건물 이름의 어울림, 절묘하다. 이름은 기억을 남긴다고 했던가. 겉으로 드러난 건물은 옛날 장수들이 입었던 갑옷의 미늘(갑찰)을 닮았다. 다만 철 미늘이 아니라 동으로 된 미늘이다. 건물이 갑옷을 입은 형상이랄까. 가로·세로 60cm 크기의 동판 1549장이 건물을 감쌌다. 동판은 그냥 동판이 아니라 한 장 한 장 사람의 손으로 두들기고 불로 구워서 만든 탄화동판이다. “망치로 두들긴 동판에 열을 가하면 온도 차에 의해 그 산화 속도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한 동판에서도 산화에 따른 시간성이 다르게 나타나죠. 그런 느낌을 주기 위해 일부러 동판을 두들겨 열을 가했습니다.” 정 건축사의 말이다. 재료 사용에 있어 건축사의 실험 정신이 돋보인다. 출입문 동판은 산화 방식을 바꿔 소금물로 닦아서 마감했다. 그야말로 ‘녹슨 느낌’이다.

 

2019년 4월 건물이 완공됐을 때, 건물 외벽은 노란빛이 강했다. 그 후 동판은 점점 갈색으로 변모하더니 이제는 검은색, 청록색도 조금씩 나타난다. 2년여의 세월 동안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다. 건물이 시간을 만나,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옷을 갈아입고 있는 것이다. 녹슨은 어느덧 시간을 축적한 공간이 됐다. 고객 입장에서는 시간과 세월의 흐름을 건물 외벽을 통해 느낄 수 있으니, 새로운 경험이다.

 

녹슨이 자리한 동네는 울산의 구도심이다. 건물들도 대부분 노후화돼 있다. 과거 한때 상업적으로 번창했던 곳임을 기억으로 더듬을 뿐이다. 주변을 살펴보면 ‘오래됨’의 흔적도 느껴진다.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는 얘기를 간직한 ‘옥골샘’도 녹슨 옆에 있다. 녹슨 자리는 표구사로 운영되던 집으로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건축주는 2017년 여름, 건축사 사무실을 찾아와 정 건축사에게 “시간이 지났을 때 더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더하여 독특하면서도 차별화된 건물은 원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했던가. 정 건축사도 작은 건축물 하나가 노후한 지역을 변모시키고 이를 통해 구도심이 활성화되면서 도시재생의 상징이 되는 건축물을 만들고 싶었다. 소위 과거-현재-미래를 담은 건물 말이다. “대화는 짧았지만, 건축주가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열려 있는 분이란 걸 깨달았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정 건축사는 건축주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동판을 건물 외벽으로 사용했을 때 건축주의 첫 반응은 어땠을까. “처음엔 건축주도 의아해했죠. 그렇다고 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 건물 외벽이 빙 둘러 동판으로 온전히 감싸이자 만족감을 표시했습니다. 이런 밑바탕에는 저와 건축주 사이에 신뢰감이 있었던 게죠.” 정 건축사는 웃으며 말했다.

 

녹슨은 정성과 공력(功力)의 결집체다. 1500장이 넘는 동판을 기술자들이 고무망치로 하나하나 두들긴 후 열을 가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건물 1~3층 바닥엔 가로·세로 7~8cm가량의 나무 픽셀이 촘촘히 박혀 있다. 이 또한 모두 수작업으로 하나하나를 붙이고 이어 바닥에 심었다.

 

 

■드러내다, 건축 언어 ‘사이 공간’

 

녹슨은 좁은 땅 위 작은 건축물이다. 그래서 각 층이 모두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설계해 위로 올렸다. 1층은 카페가 가져야 할 바리스타 영역, 2·3층은 매장으로 구성했다. 또 테라스를 둬 날씨에 따라 매장 확장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옥상에서는 공간의 세련미가 물씬 느껴진다. 사방을 벽면이 둘러싸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사각의 뻥 뚫린 공간이 숨통을 틔운다. 정 건축사는 “주변이 워낙 노후화돼 있어 크게 쾌적하진 않지만, 구도심의 풍경을 그림처럼 사각의 큰 프레임 속에 담으면 주변 경관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수직적 동선 대신 건물을 휘감아 도는 듯한 동선은 좁은 땅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 공간 설계다. 이로써 좁은 공간 속에서 건축물 내부 공간을 더 여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지상에서 지면을 향해 내려오는 방향은 반 시계 방향이고, 반대로 계단을 오를 때는 시계 방향을 따랐다. 계단을 내려갈 때 왼쪽 눈에 공간이 담기면, 시야가 넓고 편하다는 뇌 과학 이론을 충실히 따랐다.

 

1층 공간 한쪽 바닥에는 수공간을 조성하고 콘크리트 벽과 벽 사이 틈을 통해 빛이 건물 내부로 자연스럽게 들어오도록 유도했다. 빛을 유도하는 소위 ‘사이 공간’, 이 사이 공간은 정 건축사가 건축을 통해 즐겨 표현하는 대표적인 건축언어이기도 하다. 정 건축사는 벽과 벽 사이에 다양한 사이 공간을 둬 빛을 건물 내부로 유입시키고, 건물에 숨통을 틔웠다.

 

굳이 건물의 단점을 지적하자면 2, 3층 매장 공간의 뷰가 조금 아쉽다는 거다.

 

녹슨은 수많은 상을 받았다. 2019 한국건축가협회상 베스트 7, 2019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2019년 울산시 건축상 대상, 2020 독일 아이코닉 어워드 위너(WINNER), 2020 디자인 포 아시아 브론즈(동상) 등이다. 상을 준 심사위원들은 좁은 땅에서 풀어낸 공간 배치, 사이 공간, 수직적 동선 대신 휘감아 도는 듯한 계단 등 공간을 풀어내고, 활용하고, 해석하는 건축사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정 건축사는 울산이라는 공업 도시는 건축이라는 문화에 조금 인색하다고 했다. 그래서 건축의 무한한 가능성을 울산뿐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도 구현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바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살아 숨 쉬는 녹슨, 마음이 머문다

 

녹슨은 도시 재생의 상징이다. 작은 건물 하나가 노후한 도심의 모습을 바꾸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녹슨은 이름과는 다르게, 울산 구도심 속에서도 유독 빛난다.

 

시간과 정성이 만들어 낸 결정체, 녹슨은 오늘도 다양한 표정을 짓는다. 햇빛에 반사되는 빛의 각도가 다르기 때문에 건축물의 표정은 매 순간마다 달라진다. 아침·저녁, 오전·오후가 다르고, 밝은 날, 흐린 날, 비 오는 날도 그 표정이 다르다. 그래서 건물이 마치 살아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건물을 보는 재미는 덤이다. 건물 외벽과 내벽 사이로 이어지는 사이 공간에 머리나 손을 내밀어 본다. 때론 빛 공간이 되고, 숨길이 되면서 이용자들에게 여유와 휴식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몇 년 후 다시 와 보고 싶다. 그때 녹슨은 또 어떤 빛깔의 옷을 입고 있을까?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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