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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구불구불 구포~동래 오가던 장꾼들의 지름길 '만덕고개'

  • 등록 2020.05.21 02:38:58

[작가와 함께하는 고개와 길] 679. 만덕고개

 

만덕은 완만하다. 느긋하고 수굿하다. 그러면서 점점 깊어지고 점점 높아진다. 만 가지 덕을 품은 만덕에 들면 그게 무엇이든 그게 누구든 만 가지 덕을 품은 만덕이 된다. 절도 만덕이 되고 고개도 만덕이 된다. 절이든 고개든 사람이든 만 가지 덕을 품고 구불구불 고갯길에 섰거나 구불구불 고갯길을 오른다.

 

만덕에 들기는 내 생애 처음. 한 덕까진 몰라도 열 덕까진 몰라도 백 덕, 천 덕은 근처도 가지 못했거늘 내 어찌 만덕을 바랐으랴. 그러나 만덕은 만덕이다. 생애 처음인 사람을 내치지 않고 순순히 받아준다. 한 걸음 한 걸음 마침내 만 걸음에 이르러 발아래 순순히 엎드린다. 그게 오감해 나 스스로 더 엎드린다. 기꺼이 더 낮춘다. 오, 만덕이여!

 

만 가지 덕을 품은 만덕의 정겨운 고개

산세 깊어 임진왜란 때 1만 명 피난처

온천천 만년교 있던 자리가 원래 초입

산업화 속 1973년 제1터널 완공

낙동강 너머 지는 석양·붉은 노을 장관

 


 

 

“여기가 만덕고개 넘어가는 길입니다. 옆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길이라서 나이 드신 분 걷기에도 힘들지 않아요.” 향토자료 수집가 이상길 선생은 동래구청 퇴직공무원. 일제강점기를 비롯해 부산 100년 자료며 사진을 평생 모았다. 몇 년 전 큰 화제였던 동래아리랑을 찾아내 복원하기도 했다. 이 선생과 함께하는 고갯길. 어디가 옛길이고 어디에 무엇이 있었는지 한마디 한마디 보석이고 보물이다.

 

만덕고개는 동래와 구포를 잇던 지름길이었다. 터널이 생기기 이전 장꾼은 이 고개를 넘어 동래장과 구포장을 오갔다. 동래장은 2일과 7일, 구포장은 3일과 8일 섰다. 고려시대 절 만덕사에서 고개 이름을 땄다. 금정산과 백양산을 이쪽저쪽 거느려 산세가 깊고 높다. 덕분에 임진왜란 피난민 1만 명이 여기서 목숨을 구했다. 반면에 산적이 수두룩해 장꾼들 원성이 자자했다. 인터넷 검색하면 뜨는 ‘만덕고개와 빼빼 영감’ 설화도 여기 산적 이야기다.

 

이상길 선생을 만난 곳은 도시철도 명륜역. 부근 온천천에 만년교란 다리가 있었다. 동래장 장꾼은 이리로 해서 구포장으로 갔다. 동래우체국 명륜오거리 일대는 우시장이어서 이래저래 장꾼이 넘쳤다. 명륜역 롯데백화점을 지나 유락여중 삼거리 왼쪽 삼익아파트에서 화신아파트를 보고 곧장 가면 금정마을. 황전요양원으로 갈라지는 거기 굴다리를 만덕고개 시작으로 보면 된다.

 

시작은 원래 만년교였다. 근처 있었던 만년대(萬年臺)에서 얻은 이름이었다. 동래지역 군사들이 기마와 궁술을 훈련받던 데가 만년대였다. 만년교 이전에는 나무다리 서천교가 있었다. 부산이 도시화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시작하는 데가 산 쪽으로 밀려났다. 유락여중 삼거리 삼익아파트는 1960년대 한국조폐공사가 있던 자리. 야트막한 야산이었다. 야산 끝자락에 만덕고개 장꾼이 쉬어가던 주막이 있었다. 금정마을 백숙집들이 그 전통을 이어 간다.

 

“내가 공무원 하던 1980년 그 이후 포장되기 시작했어요. 고갯길 확장은 훨씬 이전인 1960년대 초에 했고요.” 고갯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스팔트 포장도로다. 방부목을 깐 길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 길이 주는 느낌은 순하고 선하다. 비좁은 고갯길은 1961년인가 1962년 넓어졌고 온천장 사람들은 ‘수훈 갑’ 양찬우 경남도지사 공덕비를 세웠다. 1963년 직할시로 승격하기 전까지 부산은 경남 소속이었다. 공덕비는 현재 행불 상태다.

 

‘축 개통 1965. 2. 6. 부산시장 김현옥.’ 공덕비 행불의 아쉬움은 1965년 세운 만덕고개 도로 개통비가 달래 준다. 개통비는 투박하면서 묵직한 게 육군 중장 출신 ‘불도저’ 김현옥 시장을 그대로 빼닮았다. 만덕고개 정상은 동래구와 북구 경계이면서 온천2동과 만덕동 경계. 육군 소장 양찬우 도지사가 고갯길을 넓힌 데 이어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1965년 고갯마루 이쪽저쪽 도로를 이으면서 만덕고개는 불굴의 군인정신을 상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만덕고개는 유아독존이었다. 동래에서 구포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었고 구포에서 동래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었다. 횡으로 난 완만한 길을 따라 사람이 구불구불 오갔고 통행량은 적었지만 차가 구불구불 오갔다. 이 무렵 만덕고개 고갯길이 얼마나 순하고 얼마나 선했는지 이상길 선생은 백 마디 말 대신 한 장 사진으로 보여준다. 사진의 힘이고 향토자료 수집가의 힘이다.

 

“남해고속도로 영향이 컸어요. 부산이 산업화하고 물동량 늘면서 터널을 뚫은 거죠.” 1973년. 만덕고개가 굴곡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은 해다. 그해 터널이 뚫리면서 만덕고개는 구불구불 생애를 접고 탄탄대로 영화를 누렸다. 터널을 따라 ‘만덕로’란 길이 났고 그 길로 곧장 가면 남해고속도로였다. 남해고속도로는 1972년 1월 착공해 이듬해 11월 2차선으로 개통했다. 개통식은 내성교차로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 선생은 개통식 사진도 갖고 있다고 했다.

 

내친걸음이었다. 가속도라면 가속도였다.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그해 두 번째 터널이 뚫렸다. 1973년 터널은 제1만덕터널, 1988년 터널은 제2만덕터널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다. 만덕고개 옛길은 1980년대 포장돼 차와 사람이 공존하는 길이 됐다. 완만하고 나무 그늘은 짙어 길에 정이 들면 한평생 정을 끊지 못한다. 초면인 사람조차 내일도 만덕에 들고 싶고 모레도 만덕에 들고 싶은데 정이 깊어질 대로 깊어지면 그 정을 어쩌나 싶다.

 

지금 선 자리는 고개 꼭대기. 김현옥 시장 개통비가 있고 갈맷길이며 향토 순례 코스며 이런저런 이정표가 있다. 동래구와 북구 경계는 굴다리다. 휘어지는 벽면이 만 가지 덕을 품은 듯 유연하다. 개통비도 볼 만하고 굴다리도 볼 만하지만, 정녕 볼 만한 건 낙동강 너머로 지는 해와 붉게 번지는 노을. 저 장엄한 풍광에 오감해서 다들 자기를 낮춘다. 반대쪽 풍광도 볼 만하다. 동래 시가지며 산 첩첩, 구름 첩첩이며 아스라한 바다. 그리하여 부산은 만덕 아닌 데가 없다. 오, 부산이여! 오, 만덕이여!

 

▶가는 길=동래에서 가는 길이 있고, 북구 만덕동에서 가는 길이 있다. 완만한 길로 가려면 동래가 낫다. 느긋하게 걸어 두 시간 거리다. 명륜역 도로 건너편 마을버스 3번을 타고 금정마을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오복누리 굴다리’가 만덕고개 초입이다. 고갯마루 너머에 석불사와 병풍암, 만덕사지, 만덕오리마을 등이 있다.

 

동길산 시인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