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 중흥을 꾀했으나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성왕(재위 기간 523-554년)의 무덤을 찾는 길이 열렸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백제 사비도읍기의 왕실 묘역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사적 제14호)에 대한 지하물리탐사 끝에 왕릉의 배치와 규모를 확인했다고 15일 밝혔다.
백제 사비기의 도읍은 부여로 538년 천도 이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죽임을 당한 성왕과 위덕왕(554-598), 혜왕(598-599), 법왕(599-600), 무왕(600-641), 의자왕(641-660) 등 총 6명의 왕이 지배했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경우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과 익산 쌍릉에 부부묘를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무왕을 제외하고 4명의 왕이 묻힌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구소는 백제 후기 능원의 종합적인 학술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대한 중장기 학술조사의 첫 단계로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묘역 중앙부와 진입부를 대상으로 지하물리탐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각 봉분의 외곽에는 호석(護石)으로 판단되는 이상체 반응이 확인됐다. 이를 통해 사비기 백제 왕릉의 봉분은 현재 복원·정비돼 있는 지름 20m 규모보다 훨씬 크게 조성됐던 것으로 파악된다.
장한길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각 봉분이 현재 복원한 것보다 큰 규모로 지름 25-30m로 추측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능산리 고분군은 성왕과 그의 아들 위덕왕 등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3기씩 상하로 2열을 이루고, 북쪽에 1기를 포함해 총 7기로 구성돼 있다. 이번 조사에서 왕릉의 배치가 동하총과 중하총, 서상총과 서하총, 중상총과 동상총이 각각 두 기씩 모여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를 통해 왕과 왕비의 무덤이 함께 조성됐거나 가족 단위로 무덤이 조성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장 학예연구사는 "올해 하반기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국립부여박물관과 업무협약을 맺고 능산리 고분군중 동하총(1호분) 내부 관대(棺臺) 조사와 능산리 중앙고분군의 전체 시굴 조사를 시행할 계획"이라며 "조사를 통해 고분간의 선후관계가 확인된다면,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사비기 왕릉의 주인과 백제 후기 능원의 모습을 밝혀내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성왕은 백제의 제26대 왕으로 538년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며 재기를 꿈꾸던 임금이었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이전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뺏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았지만 553년 신라의 배신으로 진흥왕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김동희 기자 innovation86@daej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