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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바르샤바 초토화하고 게르만도시 건설하라”

[유럽 인문학 기행-폴란드] 스타레 미아스토

 

1939년 6월 20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수개월 전이었다. 아직 초여름이었지만 날씨는 상당히 더웠다. 다시 돌아온 여름을 즐기려는 듯 마인 강에서는 철부지 꼬마들이 헤엄에 푹 빠져 있었다.

마인 강 인근 도시 뷔르츠부르크 시내로 낯선 차량 수십 대가 질주했다. 소형 지프에는 장군 여럿이, 뒤를 따르는 트럭에는 병사들이 타고 있었다. 두 번째 지프에 매우 특이한 콧수염을 가진 사내가 앉아 있었다. 독일을 전체주의로 몰고 간 나치즘의 창시자 아돌프 히틀러였다.

 

■파브스트 플랜 프로젝트

 

히틀러가 달려간 곳은 뷔르츠부르크의 ‘제3제국 건설부’였다. 이곳에서는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추진된 ‘미래 독일도시 프로젝트’, 즉 파브스트 플랜 최종 보고회가 열렸다.

 

파브스트 플랜 실천 최종안을 마련한 사람은 도시공학 박사이면서 건축가였던 프리드리히 파브스트였다. 그는 프로젝트의 기본적 실천 방향을 설명했다.

 

“바르샤바 인구는 130만 명입니다. 폴란드인이 대부분이지만 유대인도 30만 명이나 됩니다. 이들을 몰아내서 도시를 완벽하게 비웁니다. 총통의 별장으로 사용할 왕궁 등 일부 시설만 제외하고 도시의 건물 95%를 모두 부숩니다. 그 자리에 새로운 독일식 미래형 1호 도시를 만듭니다. 옛 독일 시골마을처럼 아름다우면서 현대적 시설을 갖춘 도시입니다. 그곳에 살게 될 독일인은 13만 명입니다. 이 계획의 성공 여부에 따라 동유럽에 게르만 도시를 확산시키는 계획 실천 여부가 결정됩니다.”

 

 

히틀러는 박사의 설명에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바르샤바는 동유럽을 넘어 소련으로 향하는 독일 미래의 교차로가 될 것이오. 프로젝트 추진 과정에서 일어나는 반발은 무력으로 진압하시오. 동정심이나 자비심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오. 우리는 게르만 민족의 빛나는 미래만 보아야 합니다.”

히틀러가 최종적으로 승인함에 따라 독일은 마침내 바르샤바에 독일 도시를 건설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첫 번째 단계는 전쟁을 일으켜 1939년 10월 폴란드를 점령한 것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바르샤바 주민을 모두 쫓아내거나 학살하는 것이었다. ‘주민 몰이’는 같은 해 12월 캄피노스 숲의 대학살로 시작됐다. 이후 곳곳에서 주민 몰아내기가 자행됐다. 처음에는 유대인이 목표였다. 1940년부터는 민족을 불문하고 모든 바르샤바 시민이 목표로 변했다.

 

“단 한 명도 놓치지 마라. 저항하는 자는 모두 사살하라. 도망가는 자도 마찬가지다. 어린 아이, 노인, 여자를 막론하고 누구도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라. 유대인인지 폴란드인인지를 굳이 구별하려고 하지 말라.”

 

독일군 지휘부는 병사들에게 절대 동정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방아쇠를 당길 때 절대 머뭇거리지 말라고 교육을 시켰다. 1939년의 민간인 인명 피해는 사망 1만 2000명, 부상 6만 6000명이었다. 1940년에는 사망자만 25만여 명이었다.

 

 

유대인 등 바르샤바 주민은 독일군의 무자비 작전을 피해 곳곳에 숨어 살았다. 그들은 ‘바르샤바의 로빈슨 크루소’라고 불렸다. 독일군은 ‘쥐새끼’라고 불렀다. 대표적인 인물은 영화 ‘피아니스트’의 실제 인물이었던 브와디스와프 스필만이었다.

 

■저항군의 봉기와 도시의 초토화

힘겹게 버티던 바르샤바 시민들에게 1944년 여름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소련군이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을 물리치고 7월 13일 폴란드 국경을 넘었다는 것이었다. 독일군이 곧 바르샤바에서 철수할 예정이라는 소식도 있었다.

“소련군은 곧 바르샤바에 들어올 겁니다. 그에 앞서 우리의 힘으로 독일군을 몰아내고 임시 정부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주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드디어 해방이다. 폴란드 만세!”

바르샤바 시민들은 무장 항쟁에 나섰다. 그들이 사용한 무기는 미국, 영국 등 서방의 연합군에게서 몰래 지원받은 것이었다. 이들은 부서진 건물 더미에 숨어 싸웠다. 항쟁 덕분에 9월 중순에는 비스와 강 동쪽 지역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독일군이 탱크와 대포 등 우세한 전력을 앞세워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소련군에게 패했기 때문에 사기가 떨어진 채 서둘러 철수해야 할 독일 병사들은 이전보다 더 기세를 올렸다. 소련군에 패한 분풀이를 바르샤바 저항군에 하는 것 같았다.

 

 

저항군은 무기에서 절대 열세였다. 소총 말고는 무기라고 부를 만한 게 없었다. 총알도 부족했다. 전세는 다시 역전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저항군의 피해는 커져갔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항군의 씨가 마를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왜 소련군은 안 오고 독일군이 발악을 하는 것이지?”

비밀은 며칠 뒤 밝혀졌다. 소련군은 독일군을 박살내고도 바르샤바로 진격할 생각을 하지 않고 폴란드 동부지역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들이 진격하지 않는 이유는 저항군을 전멸시키자는 것이었다.

바르샤바에 무기를 가진 저항군이 남아있으면 소련군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폴란드를 위성국가로 차지하려던 소련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이를 간파한 소련군 지휘부는 최전방에 무전을 보냈다.

‘진격 속도를 조절하라. 독일군에게 시간을 주도록 하라. 바르샤바 저항군을 전멸시키게 하라.’

독일군이 기세를 올린 것은 소련군이 의도를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르샤바 저항군을 누르더라도 폴란드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5년 동안 점령했고 게르만 도시를 건설하려 했던 바르샤바에서 그냥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한마디로 분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르샤바의 독일군 사령관인 하인리히 히믈러는 아직 끝내지 못한 파브스트 플랜 첫 단계를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지휘관 회의에서 ‘바르샤바 초토화 작전’ 개시를 지시했다.

“바르샤바를 완전히 뭉개버려라. 도시에 건물이 하나라도 남아서는 안 된다. 지평선을 볼 수 있도록 잿더미로 만들어라.”

소련군이 시간을 준 사실을 안 독일군은 여유를 갖고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그들이 무작정 때려 부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건축 분야 전문 여러 명을 투입해 계획을 짜서 차근차근 파괴 작업을 진행했다.

건축 전문가들이 설계한 계획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폭격기로 특정 지역에 폭탄을 퍼부었다. 대포 부대가 집중포격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탱크가 돌아다니며 건물에 포탄을 난사하기도 했다. 목재 건물의 경우 병사들이 화염방사기를 들고 다니며 불태웠다.

독일군이 초토화 작전을 전개한 날짜는 불과 1주일 남짓이었다. 이 짧은 시간에 바르샤바는 사람이 살지 않는 내륙의 ‘무인도’로 변해 버렸다. 도시에 남아 있는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학교, 교회, 궁전, 도서관, 대학에 이르기까지 예외는 없었다. 1747년에 만든 자우스키 도서관도 먼지로 변해 버렸다. 1주일 만에 바르샤바 전체 건물의 90% 이상이 부서졌다. 도시는 그야말로 잿더미가 됐다. 특히 구시가지, 즉 스타레 미아스토는 100% 폐허로 변해 버렸다.

소련군이 비스와 강을 건너 바르샤바에 느긋하게 들어온 것은 도시가 잿더미로 변한 다음인 1945년 1월이었다.

 

■되살아난 바르샤바

독일군이 물러가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폴란드 정부는 바르샤바 복구 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의 복구 계획은 두 가지였다. 도시를 18세기 모습으로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옛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되살려 미래 세대에 물려주자는 게 취지였다. 그들이 생각한 복원 지역은 옛날 바르사뱌의 중심지였던 구시가지, 즉 스타레 미아스토였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었다. 바르샤바를 18세기 모습대로 복원하고 싶어도 원래 모습을 아무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다 부서진 교회, 학교, 궁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사진조차 없었다. 폴란드 정부는 고민에 빠졌다.

이때 한 예술인이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베르나르도 벨로토의 그림을 참조하면 됩니다.”

벨로토는 1721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태어난 유명한 풍경화 전문 화가였다. 스물한 살 때인 1742년 로마에 가서 도시의 모습을 담은 대형 풍경화 여러 점을 그린 게 이름을 날린 계기가 됐다. 그는 1744~45년에는 북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여러 도시의 대형 풍경화를 만들었다.

 

 

국제적 명성을 얻은 벨로토는 1747년에는 폴란드 국왕 겸 작센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트 3세의 초대를 받아 당시 드레스덴에 갔다. 그는 아우구스트 3세의 요청을 받아 드레스덴과 피르나의 풍경화를 여러 점 그렸다.

1761년 아우구스트 3세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벨로토는 일자리를 잃어 버렸다. 그는 새 일자리를 찾으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여행 도중에 막 폴란드 권좌에 오른 스타니스와프 국왕의 초대를 받아 바르샤바로 발길을 돌렸다. 국왕은 그를 후하게 대접하면서 풍경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바르샤바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에 담아 주시오. 아우구스트 3세 선왕께서 베푸신 만큼 지원을 해 주겠소.”

벨로토는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16년 동안 바르샤바에서 도시 풍경을 담은 그림 20여 점을 남겼다. 그는 풍경을 사진처럼 완벽하게 담아내기 위해 ‘카메라 암상자 기법’을 이용했다. 카메라의 이미지를 캔버스에 투사한 뒤 그 위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하면 사진처럼 정밀한 풍경화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벨로토가 바르샤바의 풍경과 건물 모양을 실제 그대로 정확하게 그렸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다. 그가 화가로서의 상상력을 발휘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폴란드 정부는 벨로토의 그림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수집한 그림은 수십 점이었다. 그의 작품은 바르샤바 복구 작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구시가지, 즉 스타레 미아스토 복원에서는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중요한 자료가 됐다.

 

 

폴란드 정부가 1950년에 시작한 도시 복원작업은 1970년대에야 마무리됐다. 그들은 소련의 도움은 전혀 받지 않았다. 국가 예산과 국민 성금으로만 사업을 진행했다. 도시의 파괴를 방조한 소련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완벽하게 재건된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20세기에 복원된 공간이지만 13~20세기의 역사를 담은 지역이라는 게 등재 이유였다.

바르샤바 재건에 사용된 벨로토의 그림은 처음에는 바르샤바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었다. 1980년 바르샤바 왕궁 건물을 재건한 뒤에는 그곳으로 옮겼다. 지금 구시가지 입구에 있는 바르샤바 왕궁에 가면 맨 꼭대기 층의 ‘카날레토의 방’에서 그림들을 볼 수 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