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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8)] 양평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혈의'

강철같았던 '슈퍼셀럽' 몽양…그를 쓰러트린 건 일제가 아닌 동포의 총탄

 

장마를 앞둔 6월 말. 덥고 습한 날씨에도 양평군에는 활기가 돌았다. 자전거를 타고 자연을 즐기려는 방문객과 연잎이 수놓은 두물머리를 즐기려는 관광객 등이 지역에 활기를 더했다.

 

양평군 양서면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에도 평일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행되는 탄신 136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몽양을 잇다-몽양의 눈빛'을 관람하려는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19세기 태어나 대일항쟁기 최고의 셀럽(유명인을 뜻하는 Celebrity의 줄임말), 몽양 여운형의 삶과 그가 남긴 유산을 쫓아본다.

 

 

독립운동가, 사상가, 언론인….

 

1886년 5월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서 태어난 몽양 여운형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사상가, 선교사, 언론인, 여행가, 교육자로 알려져 있다. 190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노비 문서를 불태워 해방했으며, 고향집에 기독교 광동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배우 송강호 주연의 영화 'YMCA야구단(2002)'으로 알려진 한국 최초의 야구팀인 YMCA 야구부 주장으로 일본 원정경기까지 다녀온 인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킨 신한청년당의 발기인이자 도쿄에서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한 독립운동가,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해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면서 사임할 때까지 언론인으로 살았다.

 

아버지 사망후 노비 문서 불태우고
고향집에 '광동학교' 세워 신학문 교육
도쿄에서 '독립 역설'… 대중적 인기

 

광복을 맞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1947년 암살됐다는 것이 그를 설명하는 이력이다.

대일항쟁기에 극좌와 극우 모두로부터 외면받으면서 2008년 뒤늦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기까지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잊힌 인물이기에 몽양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설명이다.

 

 

19세기에 태어난 21세기형 셀럽

 

"오직 인간은 낳을 때부터 평등이니 주종지의(主從之義)는 어제까지의 풍습이요. 오늘부터는 그런 오래된 생각을 탈피하고 제각기 알맞은 직업을 찾아라."

배재학당, 우무학당에서 공부하며 신학문을 배우던 그가 부친이 사망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노비 문서를 태우며 한 말이다. 이후 그의 다양한 활동에서 탈권위적인 모습, 사람 사이에 차이와 차별을 지우는 모습에서 이날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905년 3년간 상을 치르는 중에 고향집에 광동학교를 설립해 신학문을 가르쳤는데,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자 김용기 장로가 그의 대표적인 제자다. 광동학교의 과정이나 학생들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가 끼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정치인·사상가·언론인
선교사·여행자·교육자… 다양한 정체성
YMCA야구단 활동… 운동교재도 집필

 

모친상과 부친상을 연달아 겪으면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을사늑약 소식을 접하고 거리로 나가 나라를 망친 집권자들에 대한 분노와 민중의 자각을 주장하는 연설을 펼치며 본격적으로 대중 앞에 섰다.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자 여운형은 주민들에게 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자고 호소하기도 했고, 한양의 승동교회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면서 해외에서도 넓은 인맥을 갖추게 됐다. 나중에 미국의 매거진 LIFE에서 그를 '은도끼Silver Axe'라는 수식어를 붙여 소개할 만큼 해외에서도 알려진 인물이었다.

YMCA야구단으로 활약하면서 현대적 스포츠인으로도 조명받은 그는 운동교재를 쓸 정도로 스포츠에도 '진심'이었다.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몽골의 고비사막을 횡단한 여행자로, 나중에 조선중앙일보에 기고하는 지금으로 따지면 여행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몽골, 중앙아시아, 소련 민중들의 삶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어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쯤만 돼도 다양한 분야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을만한 셀럽이지만, 특히 그를 주목하게 만든 건 도쿄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선 민족의 독립에 대한 결의를 연설하면서다.

일본 한복판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외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의 대중적 인지도 때문에 일제 역시 참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단 설명이다.

그로 인해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다.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다 보니 이른바 '협찬'이 이어져 의상을 담당하는 스타일리스트가 있었다는 대목에서 그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몽양기념관 강지현 학예연구사는 "몽양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고 대중적으로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독립운동가"라며 "신분의 차이, 남녀의 차이와 싸운 그의 정신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여러 교훈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여러 분야에서 주목을 받는 셀럽인 여운형,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이후 혼란한 정세 속에서 삶을 마무리하게 된다.

 

 

여운형 혈의

해방 이후 대한민국. 그 혼란한 시기 1947년 7월 한달간 집계된 것만 128건의 테러가 발생했다. 그 중에서도 여운형 선생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가장 많았다.

 

해방후 혼란 정국서 집중적 테러 시달려
수많은 위기 모면했지만 '1947년 암살'
좌우 모두 외면… 2008년에야 '건국훈장'
마지막 입은 '혈의' 국가등록문화재로

1945년 8월에는 괴한들에게 곤봉으로 피습을 당했고, 그해 9월에는 서울 원사동에서 괴한들에게 붙잡혔으나 행인의 도움을 받아 탈출할 수 있었다. 1946년 1월에도 친구집에서 괴한의 습격을 당하고, 4월에는 괴한들에게 포위당하기도 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 다음 달에는 수류탄 테러 시도도 있었지만 사전에 발각됐고, 7월에는 테러범을 피해 벼랑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강도는 더욱 심해져 몽양이 사망하기 3개월 전에는 자택 침실이 폭파되는 일도 있었고 5월에는 총격을 받기도 했다.

그는 암살 사건이 있던 그 날 아침에도 동지에게 편지를 보냈는 데,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 하에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받고 있소이다"라는 문장에서 그의 삶이 사선(死線) 위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걸쳤던 옷은 '여운형 혈의'라는 이름으로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됐다.

그가 권총 테러로 피격당할 당시 입고 있던 옷으로 맞춤 정장 재킷 한 점과 연한 푸른색 스트라이프 셔츠 한 점, 그 안에 받쳐입었던 러닝셔츠 한 점이다. 이 가운데 러닝셔츠는 피격 후 치료를 위해 앞 중심이 절개된 상태다. 왼쪽 가슴에 집중된 혈흔에서 당시 몽양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얼마나 계획적인 것이었고 숙련된 테러범의 소행인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몽양의 조카손녀인 이혜원씨가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 지난 2014년 10월 29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