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림강릉 1.3℃
  • 서울 3.2℃
  • 인천 2.1℃
  • 흐림원주 3.7℃
  • 흐림수원 3.7℃
  • 청주 3.0℃
  • 대전 3.3℃
  • 포항 7.8℃
  • 대구 6.8℃
  • 전주 6.9℃
  • 울산 6.6℃
  • 창원 7.8℃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순천 6.7℃
  • 홍성(예) 3.6℃
  • 흐림제주 10.7℃
  • 흐림김해시 7.1℃
  • 흐림구미 5.8℃
기상청 제공
메뉴

(제주일보) 일제 향해 목 놓아 독립운동 변론 외쳤다

(129)갱도진지·이창휘 항일지사
가마오름 일대 평화박물관 
역사 구현하나 현재 폐쇄돼

고산리 태생 이창휘 변호사
독립운동 변호 위해 법조인 꿈
제주신인회 사건 등 변론 맡아

 

▲폐쇄된 가마오름 갱도진지


현재 평화박물관이 휴관 중이므로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다.
미군이 상륙할 가장 유력한 지점으로 제주도 서부지역 일대를 예측한 일제는, 일본군 중에서도 최강으로 알려진 제111사단을 이곳에 주둔케 했다.
지난주에 소개한 한장동 해안 갱도진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경면 청수리(1166번지) 가마오름에도 일제는 갱도진지를 구축했다. 일본군 최고사령부가 주둔했다는 이곳 갱도는 도내 일제진지 중 가장 길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의 갱도진지는 그 전모를 쉽게 알 수 없는 미로 형태인 3층 구조로 되어 있다.
등록문화재(제308호)로 지정된 이곳 가마오름 일대에 전쟁역사를 알리는 ‘평화박물관’이 2006년 들어섰다.
 

 

박물관 내부에는 일본군 사령관실과 회의실 그리고 작업실 등의 공간을 재현해 놓았다. 하지만 이곳은 지금 폐쇄되어 있다.
평화박물관을 다시 찾아간 날, 입구에는 대표이사 이름으로 ‘2019년 9월부터 사정상 휴관’한다는 안내판이 전시되어 있었다.
도민뿐만 아니라 내외국인이 알아야 할 일제침략의 현장을 개인이 막고 있다는 사실에 답사팀은 누구를 탓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마음이 일어 발걸음이 무거웠다.
 

 

 

▲고산리가 낳은 항일지사 이창휘 변호사


‘독립운동은 범죄가 아니다.’라고 일제를 향해 외쳤던 이창휘(1897-1934) 항일지사는 고산리 칠전동(1695번지)에서 태어났다.
지역의 영특한 소년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당시 구우면장의 추천으로 이창휘는 조금 늦은 나이에 제주농업학교에 입학하고 다음 해에 결혼하여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어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 법학과를 졸업한 해인 1924년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항일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 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의 망명을 결심했던 이창휘는 ‘망명 투사 못지않게 변호사가 되어 독립운동을 변호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라는 지인의 설득에 법조인이 되기로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발행 제3호 변호사 자격증을 받은 이창휘는 농촌 계몽운동을 위한 강연회 등의 주요연사로 활약하는 한편, 사립 고산초등학교 지원 등 향리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제주출신 유학생후원회·보성전문학교 교우회·조선변호사협회 회장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이창휘 변호사는 특히 독립운동가와 사상가, 그리고 민중운동에 헌신하는 인사들의 무료 변론에 앞장섰다. 제주신인회 사건, 제주 조선공산당 사건, 제주·대구 신간회 사건, 제주인 김문준(일본전협) 사건, 제주·목포 무정부주의 우리계 사건, 도산 안창호 사건, 6·10만세 사건, 여운형 사건, 간도공산당 사건, 광주학생 사건 등의 수많은 사건을 맡아 변론하였다. 묻혀있던 이창휘 변호사에 대한 업적은 동향인인 故 고원준 옹과 추모사업회 진재언 회장 등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지영록은 현존하는 제주도 최초의 인문지리지로 알려져 있다. 제주의 옛 지명인 ‘영주(瀛州)’에서 비롯되어 제목으로 붙여진 지영록에는, 제주도 지방문화 및 지방사는 물론 표류에 관한 기록을 비중 있게 다루어져 있다. 조선시대 외국인 표류 상황과 표류민 송환 체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있다 하여 2018년 10월 보물 제2002호로 지정되었다.
지영록(知瀛錄)은 제주목사 이익태가 3년간 재임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모아 간행한 책이다. 특히 하멜의 표류와 김대황의 표류 등에 관한 기록으로 더욱 유명하다.
지영록에서 발췌한 다음의 부분은 당시의 고산리 지경과 표류인에 대한 대우 등을 알 수 있는 내용이라 여겨 여기에 덧붙인다.
1693년(숙종 19년) 7월 26일 대정현 차귀진 해안에 표류했던 왜인 3명이 (한경면) 두모촌에 나타났다. 머리 양쪽 사이에 약간의 머리털을 남기고 머리통 뒤로 고리를 지어 묶인 모습이었다. 장옷으로 아랫도리를 감춘 표류인들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키고 배를 두드리며 배고픈 표정을 지었다.
생김새가 괴상하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촌민들이 놀라 흩어지자 그곳 이임(里任)이 (차귀진) 조방장에게 급히 보고하였다. 왜학(통역관)으로 하여금 표류인에게 사정을 묻고 난 다음에야 국적이 왜인(일본인)임을 알게 되었다. 다음은 왜인의 대답이다.
‘우리는 일본국 사람입니다.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고 있는데 우리 3인이 고깃배에 함께 타고 바다 가운데로 나갔다가 악풍을 만나 큰 바다로 표류하였습니다. 돛은 부러지고 노는 꺾어졌으며 배안에는 물이 찼습니다. 의복과 쌀은 있었지만 고기 낚는 도구는 죄다 쓸려 버렸고 음식을 못 먹은 지 7주야가 되었습니다. 밤바람에 쫓기다가 다행히 이곳 해안 가까이 닿을 수 있었습니다.
탔던 배가 파도에 밀려 여에 부딪히자 배를 버리고 밑으로 뛰어내렸습니다. 밤은 이미 캄캄하여 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없었습니다. 몹시 배가 고팠지만 저희 세 사람은 바위 밑에서 자고 나서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가 언덕(당산봉으로 추정됨)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니 동북쪽에 사람 사는 집이 보였습니다.
겨우 일어나 쓰러지고 넘어지면서 앞으로 가다 길에서 물을 길러가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를 보자 놀라 달아났습니다.
우리는 뒤따라 그 집에 도착하여 문 앞에서 배를 두드리고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키며 배고픈 시늉을 하였습니다.
그 집에는 병든 남자가 있었는데, 그가 밖으로 나와 우리에게 건네준 보리밥을 먹고 있을 때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습니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