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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부처님오신날] 비슬산이 품은 달성의 네 사찰

 

8일은 불기 2566년 부처님오신날. 대구 달성군내 각 사찰들은 이날 연등회와 봉축법회, 찬불축제 등 풍성한 불교행사를 통해 부처님의 자비정신을 기리게 된다.

 

한때 달성군에는 비슬산을 주봉으로 해 골골마다 수백곳의 사찰들이 들어서 부처님의 설법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운데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강제폐사 된 이후 지난 2014년 새롭게 중창된 대견사를 손꼽을 수 있다.

 

여기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의 승병 훈련장이었던 호국사찰 용연사, 도성국사가 창건하고 일연 스님의 전설을 간직한 유가사와 운흥사 가람은 사부대중의 기도와 수행처이자 한국불교의 내일을 열어가는 근본 도량이 되고 있다.

 

 

◆대견사

 

비슬산 대견사가 복원, 중창 8년째를 맞고 있다. 대견사는 중창 이후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가피(加被)와 영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일약 전국적인 기도 도량으로 부각되고 있다.

 

삼국유사의 일연 스님이 22년 동안 주석(駐錫·승려가 머뭄)하고, 일제강점기에 강제 폐사된 비슬산 대견사는 거의 100여년 만에 중창됐다. 특히 대견사는 현재 전국 3천200여 곳의 폐사지 가운데 중창 제1호 사찰로 기록돼 의미를 더하고 있다.

 

대견사는 비슬산 대견봉의 정상부 남쪽에 터를 잡았다. 창건 시기는 신라 헌덕왕 때로 여겨진다. 절 뒤로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남쪽 눈앞으로는 시야가 탁 트여 산악과 평야, 굽이치는 낙동강을 전망할 수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대견사는 광해군과 인조대에 중창돼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사세(寺勢)를 유지하지 못했다.

 

이후 대견사는 영친왕 즉위와 대한제국 축원을 위해 1900년 중수됐다. 영친왕이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난 뒤인 1908년 몰락했고, 191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0년 실시한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김문오 군수는 취임 일성으로 "폐사된 대견사를 복원, 중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오랜 진통 끝에 문화재청으로부터 허가(현상변경)가 났다. 이어 15명으로 구성된 '대견사 중창추진위원회'는 대견사를 어떻게 중창할 것인가에 대해 설계공모에 나섰다.

총 50억원의 사업예산으로 대웅전 64.17㎡, 선당 58.32㎡, 종무소 58.32㎡, 산신각 5.04㎡ 등의 규모로 조성됐다.

 

대견사는 착공한 지 1년 만인 지난 2014년 3월 1일 중창에 따른 개산식을 열었다. 달성군과 조계종은 대견사의 산문을 여는 날을 일제에 항거해 독립만세를 외쳤던 3·1절로 잡아 '강제 폐사'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했다.

 

 

◆용연사

 

대구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에 위치한 용연사(龍淵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 말사이다. 특히 사명대사의 혼이 담긴 호국사찰이라고 불린다.

 

1722년 임수간이 지은 용연사중수비의 비문과 1748년 금곡 선청이 쓴 '용연사사적'에 따르면 용연사는 신라 신덕왕 1년(912) 보양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후 사명대사가 인잠·탄옥·경천 스님 등에 명을 내려 대웅전 등 다섯 동의 전각이 들어서고 20여 명의 승려가 살게 됐다. 그런데 효종 1년(1650) 어느 날 저녁 예불을 위해 등불을 켤 무렵 별똥이 떨어져 불이 나서 종각만을 남긴 채 절이 온통 타버리고 말았다.

 

이를 다시 10여 년에 걸쳐 복구하였을 때는 이백 수십 칸이 넘는 대가람이 됐다, 절 앞의 시내에는 용문·천태·무릉·방은·홍류 등 돌을 다듬어 만든 다리가 다섯 개나 놓였다.

 

이렇게 큰 절의 규모를 갖추고 나서 용연사는 신앙의 핵심이 되는 불사리를 모시는 내실을 다지게 된다. 현종 14년(1673) 석가여래부도, 곧 불사리탑을 세운 일이 그것이다. 용연사 또한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갖춘 절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뒤 숙종 41년(1715)부터 7년에 걸쳐 대웅전 등 여러 건물을 중수하고 단청을 새롭게 올렸으나, 불과 4년 만인 영조 2년(1726) 정월 초하루에 대웅전과 동서의 별실, 좌우의 승당이 다시 불에 타는 재난을 당했다.

 

당시 승통 혜조를 중심으로 대중들이 이를 복구하여 영조 4년(1728)에 중건을 마쳤다. 그러고 나서 28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모습으로 용연사는 우리와 만난다.

 

법당의 중심선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벗어난 자리에는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하나 놓였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탑이다. 또 극락전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유가사

 

대구 달성군 유가읍 양리에 위치한 비슬산 유가사(瑜伽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827년(신라 흥덕왕 2년) 도성국사가 창건했다. 절 이름은 비슬산의 바위 모습이 아름다운 구슬과 부처의 형상과 같다 하여 옥 유(瑜), 절 가(伽) 자를 따서 지어졌다.

 

전성기에는 3천여 명의 승려가 머무른 대종찰이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 1682년(숙종 8) 도경이 대웅전을 보수한 데 이어 1729년(영조 5) 취화와 파봉, 1760년 보월, 1776년 밀암, 1797년 낙암이 각각 중수 또는 중창한 바 있다. 1976년부터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용화전·산령각·범종루·천왕각·백화당·나한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측면 각 3칸으로 내부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1964년 우송(友松)이 제작한 칠성탱화와 신중탱화가 함께 모셔져 있다. 용화전은 정면·측면 각 1칸으로 내부에 높이 102㎝인 석조미륵불좌상이 있다.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로 석가모니삼존불과 후불탱화, 삼존불 좌우에 각 8폭씩 십육나한도가 있다. 산령각은 정면·측면 각 1칸으로 1976년에 조성된 산신탱화와 독성탱화가 자리하고 있다.

 

유물로는 괘불과 삼층석탑, 낙암과 월호 등 15인의 승탑이 서 있다. 승탑은 모두 석종형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또 괘불은 가뭄과 질병, 왜군의 침략 때마다 마을 주민들이 찾아가 소원을 빌던 유물이다. 삼층석탑은 1920년 인근 원각사지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높이 3.64m로 고려시대 유물로 추정된다.

 

유가사에서 위쪽 1.2㎞쯤 떨어진 비슬산 중턱에 위치한 도성암은 영남지역에서는 가장 유서 깊은 선원 중 하나다. 신라의 명승인 도성국사가 도를 통한 곳으로 전해진다. 암자 뒤 거대한 바위가 도통바위다.

 

 

 

◆운흥사

 

대구 달성군 가창면 오리 최정산에 자리한 운흥사(雲興寺)는 신라 흥덕왕(興德王)때 승려 운수가 창건하여 동림사(棟林寺)라 불렸다고 구전되고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운흥사에서 승병 300여 명을 지휘하여 왜적을 격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비슬산은 승병들의 최대 훈련장이었고 사명대사는 이곳 용연사에 기거하며 승군을 지휘했다.

 

그 당시 청도를 점령한 왜군들이 팔조령을 통해서 대구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순찰사 이용순이 병사를 거느리고 팔조령으로 향했다.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들도 뒤를 따랐다. 왜군이 팔조령에 나타나자 겁에 질린 순찰사 이용순이 활과 창을 버리고 말등에 채찍을 가하면서 달아나고 말았다.

 

하지만 사명대사는 휘하의 승군을 냉천(가창면)의 절벽 위에 매복하는 등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왜군을 섬멸시켰다. 사명대사가 이끈 수십 명의 병사들이 수백 명의 왜군을 물리친 이른바 '냉천승첩'이 구전되고 있다.

 

1620년(광해군 12)에 무념 대사(無念大師)가 중창했고, 1757년(영조 33)에 치화 대사(致和大師)가 중건하였다. 이 무렵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대구부(大邱府) 불우(佛宇) 조에 '최정산운흥사'가 실려 있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정형적인 산지 가람이면서도 산지 중정식 가람 배치와는 그 방식을 달리하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쪽 좌우에 종무소와 요사채가 대향하고 있다. 대웅전 배면에 삼성각이 배치된 'ㄷ' 자형 배치이며 근년에 전면 축대와 육각정(六角亭)을 건립하여 전반적으로 옛 모습이 많이 상실되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규모의 건물로 외2출목 내3출목의 다포계(多包系) 양식을 지니고 있다. 살미의 모양은 앙서[仰舌: 끝이 위로 삐죽하게 휘어 오른 쇠서받침]형으로 끝부분이 비스듬히 자른 것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법을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