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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1834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화재의 진실은?

[유럽인문학기행-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2)

“이게 무슨 냄새지? 나무를 태우는 냄새가 나잖아! 뒤뜰에서 불을 때고 있나?”

 

1834년 10월 16일 오후 4시 무렵이었다. 신사 두 명이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궁전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당시 웨스트민스터 궁전은 영국 정부 청사 및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두 신사는 정부 공무원으로 일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궁전 곳곳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두 사람은 영국 해군이 1591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른 장면을 묘사한 ‘아마다 태피스트리’를 보고 싶어 상원 복도로 갔는데 무슨 영문인지 복도에는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연기가 너무 짙어 ‘아마다 태피스트리’를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둘은 할 수 없이 궁전에서 나가면서 관리사무실에 신고를 했다.

 

“상원 복도에서 심하게 타는 냄새가 나네요. 혹시 불이 났을지 모르니 한 번 살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화마에 휩싸인 궁전

 

대다수 직원들은 두 사람의 신고를 무시하고 오후 5시에 퇴근해버렸다. 경비원 등 일부 직원만 남아 있었다. 1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마침 웨스트민스터 궁전 입구에 앉아 있던 경비원 부부가 이상한 연기와 열기를 느꼈다.

 

“여보, 연기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아요? 몇 시간 전부터 좀 더운 것 같기도 하고….”

 

“글쎄. 그런 것 같군. 나는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당신이 무슨 일인지 한 번 살피고 올 수 있을까?”

 

부인은 경비실에서 나가 ‘블랙 로즈 박스’(Black Rod’s Box) 문을 열고 들어갔다. 블랙 로드는 영국 국회에서 질서 유지 업무를 맡는 관리의 별칭이었다. 블랙 로즈 박스는 그 관리의 사무실이었다.

부인이 블랙 로즈 박스 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불기운이 밖으로 뛰어나왔다. 방 안은 온통 불길로 휩싸여 있어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나무로 만든 벽은 벌겋게 타고 있고, 바닥의 양탄자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올라왔다.

 

“불이야! 불이 났어요. 블랙 로즈 박스가 불길에 휩싸였어요.”

 

불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야간 근무조 직원들이 블랙 로즈 박스로 달려왔다. 그들은 화장실에서 양동이에 받아온 물을 부어 불을 끄려고 시도했다. 불길이 조금 잦아드나 싶을 때 이번에는 다른 방에서 불길이 번져 나왔다.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미 화재는 몇몇 직원들의 힘만으로 막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궁전 인근은 물론 멀리 윈저 성에서도 궁전 위로 솟아오르는 불기둥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손도 못 쓴 소방본부

 

“불이야, 큰 불이 났어요. 웨스트민스터 궁전에 큰 불이 일어났어요.”

 

웨스트민스터 궁전에 대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런던소방본부에 전해졌다. 거리에서 불을 본 시민들이 연이어 런던소방본부에 화재 소식을 알린 것이었다. 당시 런던소방본부는 공공기관이 아니었다. 런던에 13개 소방서를 갖고 있고 소방대원도 80명을 데리고 있었지만, 보험회사에서 운영하는 개인 기업이었다.

 

원래 런던소방본부는 보험회사에서 출동을 요구해야 불을 끄러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보험회사의 요구가 없었지만 웨스트민스터 궁전에 불이 났다고 하니 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늦게 출동했다가는 나중에 보험회사들에게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런던소방본부의 소방대원들이 현장에 갔을 때에는 이미 상황은 악화될 대로 악화돼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궁전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많은 시민은 다리 건너편에서 신기한 듯 불구경을 하고 있었다. 윌리엄 터너라는 화가도 구경꾼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직접 본 장면을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화재’라는 제목의 그림에 담았다.

 

당시 런던소방본부 대장은 제임스 브레이드우드였다. 역사책에는 1824년 에든버러에 최초의 소방서를 차린 사람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그는 화재현장을 보는 순간 절망감을 느꼈다.

‘아, 우리가 끌 수 있는 불이 아니구나. 이미 늦었구나.’

 

 

사실 19세기에 런던소방본부가 했던 소방작업이라는 것은 화재현장에서 불을 끄는 게 아니라, 불난 집에서 값비싼 물건 등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장비도 변변찮았다. 브레이우드는 엄청난 화재 현장을 보자 눈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대장님. 뭐하세요? 대원들에게 어서 불을 끄러 들어가라고 하세요.”

 

“이대로 보고만 계실 거예요?”

 

주변의 시민들은 어서 서둘러 화재 진압에 나서라고 독촉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잘못 하다가는 소방대원들만 다치거나 죽을 판이었다. 그래도 많은 시민이 보고 있는데다 궁전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어 소방대원들은 위험하더라도 현장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소방대원들은 할 수 없이 죽음을 무릅쓰고 궁전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일부 시민들도 동참했다. 거세던 불길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꺼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껐다기보다는 다 타서 저절로 꺼졌다고 보는 게 맞다. 웨스트민스터 궁전은 화재 때문에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기막힌 화재 원인

 

화재를 진압한 뒤 영국 정부와 의회, 런던소방본부는 화재 원인을 정밀하게 조사했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힌 이유가 밝혀졌다.

 

“아니, 어떻게 나무로 만든 부절을 실내에서 한꺼번에 다 태울 생각을 합니까?"”

 

“결과적으로 불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부절 몇 개 때문에 엄청난 피해가 났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면 어떻게 될지 아시고 이러십니까?”

 

“….”

 

웨스트민스터 궁전에 화재가 난 것은 실내에서 부절을 태웠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나무 부절을 태우다 과열 때문에 불이 났다는 것이었다.

 

부절은 옛날부터 영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문맹자들을 위해 계산을 하거나 문서를 기록할 때 쓴 수단이었다. 1724년 영국 재무성은 모든 직원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상황에서 더 이상 부절을 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부절을 모두 폐기처분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100년 이상이 지나도록 일부 부서에서 부절은 폐기되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다. 재무성은 불이 나기 며칠 전 부절을 없애라고 웨스트민스터 궁전 관리부서에 다시 촉구했다. 이 때문에 부절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직원들 사이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난방용으로 땔 나무조차 구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땔감으로 주도록 하죠.”

 

“재무성 내규에 따르면 그렇게 하는 건 불법입니다.”

 

결국 부절 처리는 리처드 웨블리라는 직원이 담당하게 됐다. 그는 처음에는 부절을 궁전 바깥의 공터에서 태워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인근 주민들이 항의할 것 같아 생각을 접어야 했다. 그는 상원의 난방시설인 석탄 화로에 부절을 집어넣어 태워버리기로 했다. 아일랜드 출신 노동자인 조슈아 크로스와 패트릭 펄롱을 불러 일을 맡겼다.

 

크로스와 펄롱은 하루 종일 부절을 석탄화로에 집어던지며 태웠다. 웨블리는 이렇게 하다가는 불이 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석탄 화로는 지난 겨울 이후 오랫 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부절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집어넣어 태울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한꺼번에 부절을 많이 태우면 안 돼. 석탄화로가 과열돼서 불이 날지도 몰라. 집에 일찍 가려고 서둘러 무리하면 안 돼. 나는 이만 퇴근할 테니 천천히 태워.”

 

“예. 웨블리 씨, 시키는 대로 합죠.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댁에서 편안히 쉬시기만 하면 됩니다.”

 

 

조슈아와 펄롱은 웨블리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일을 어서 끝내고 집에 가려는 마음 뿐이었다. 둘은 쉬지 않고 부절을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석탄 화로는 점점 과열됐고, 연기와 열기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둘은 부절을 다 집어넣은 다음에는 불이 완전히 꺼졌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집에 가 버렸다.

 

이들이 퇴근하고 1시간 뒤에 화로에서 다시 불길이 치솟았다. 부절이 여전히 타고 있던 석탄 화로가 과열돼 녹아내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화로 인근에 있던 나무나 종이에 불길이 옮겨 붙었다. 이어 지하실의 천장을 받치고 있던 나무 들보에 불이 붙었고 1층, 2층으로 번졌다.

 

 

한편 웨스트민스터 궁전이 뜻밖의 화재 때문에 전소돼 버리자 당시 국왕이던 윌리엄 4세는 궁전을 새로 짓기로 했다. 1840년 공사를 시작해 상원 부분은 7년 뒤에 완성됐고, 하원 부분은 12년 뒤에 다 만들어졌다. 일부 구역은 20년 이후에까지도 공사를 이어갔다. 하나씩 둘씩 공사를 마무리한 끝에 웨스터민스터 궁전은 오늘날 템스 강을 배경으로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됐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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