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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천성진성 출토 갑옷은 러·일전쟁기 일본군 침탈 흔적”

 

 

 

‘일본군, 가덕진 군기고 약탈

1905년 갑주 5건 탈취’ 기록

 

“탈취한 두정갑 천성진으로 이송

배에 옮기다 객사 앞 폐기” 분석

 

객사 앞 대는 의식용 월대 추정



 

부산박물관의 천성진성 제4차 발굴조사는 그동안 옛 지도(1872년 제작된 ‘군현지도’)를 통해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었던 천성진성 객사의 실체를 직접 확인(부산일보 4월 1일 자 1·2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아직 한 번도 확인된 사례가 없는 월대(月臺)로 추정되는 대(臺)가 나왔고, 객사 터 인근에서는 두정갑 철 갑찰(미늘)이 무더기로 출토됐다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일부 유적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눠져 보다 확실한 자리매김을 위해서는 향후 출토 유적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두정갑은 본래 가덕진에 있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번에 출토된 두정갑의 출처다. 두정갑이 본래 있었던 자리를 놓고 천성진성 4차 발굴조사 자문위원인 부산대 윤용출(역사교육) 명예교수는 당시 가덕도 주변 상황과 연결짓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놨다. 윤 교수는 “투구를 포함해 갑옷이 원래 인근 가덕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1905~1907년 사이에 일본 군인들이 가덕진 군기고에 있는 무기를 약탈하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 1905년 1월 일본 육군 소속 군인들이 가덕진 군기고에 있던 무기를 탈취해 갔고, 이어 천성진의 군기고도 약탈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들었다.

 

천성진성에 갑주(갑옷과 투구)가 있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고, 가덕진 군기고에서만 ‘갑주 5건’이 탈취되었다는 기록이 당시 내각 문서인 ‘내부내거문’에 나오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 군인은 가덕진에서 총 17자루, 환도 15자루, 천성진성에서는 대포 4문, 탄환 2통, 화약 1통 등을 약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윤 교수는 “일본 군인들은 가덕진성에서 탈취한 갑주 등을 천성진 앞바다에 정박한 일본 배에 옮겨 싣는 과정에서 일부를 천성진 객사 앞에서 태우거나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천성진성 출토 두정갑은 최초로 발굴된 조선시대 두정갑 유물이면서, 일본의 조선 침략이 점점 가시화되는 조선말 격동기인 1900년대 초반 러·일 전쟁 무렵 가덕도에서 일본군의 침탈 흔적을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이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 무렵 일본은 가덕도 외양포에 포진지를 세우는 등 마을 전체를 그들의 병영으로 만들었다.

 

 

■월대일까? 단순 대일까?

 

천성진성 객사 앞쪽에서 확인된 대(臺)의 실체 규명은 앞으로의 숙제다. 지난달 31일 발굴 현장에서 이뤄진 학술자문회의에서는 부산대 건축학과 서치상 교수는 “단순한 대가 아니라 형태상 월대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성곽 전문가인 복천박물관 나동욱 관장도 “월대로 추정된다”면서 “이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좀 더 조사해 봐야겠지만, 의식 등 소규모 행사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고 말했다. 만약 월대라면 경상도 지역에서는 처음이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전라북도 고창 무장읍성 객사를 비롯해 전라남도 나주 객사, 순천 낙안읍성 객사, 강진 병영성의 객사 터에서 월대의 흔적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대의 규모가 너무 커, 월대로 보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또 인근 가덕진성보다 낮은 천성진에 월대가 있었다는 것은 위계상 맞지 않고, 관련 사례도 적어 섣불리 판단하기는 이르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대체적 시각은 단순히 대보다는 월대 쪽에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대가 어떤 용도로 사용됐는지 아직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한 상태라 향후 더 세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두정갑 제작 연대는

 

객사 터 주변 매몰토에서 나온 두정갑의 제작 연대 규명도 필요하다.

 

이번에 출토된 두정갑 미늘은 형태나 치수, 비율 등이 일정하지 않지만, 주류를 이루는 갑찰의 크기는 대략 7×9cm로 일반적인 조선 후기 장관급 철갑의 갑찰보다 크다. 전문가들은 갑옷의 크기와 500점이 넘는 두정갑 미늘이 나와, 최소 3벌 이상의 갑옷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세로로 두정을 배치한 것으로 미뤄 제작 연대를 조선후기로 예상한다.

 

복식 전문가인 숭의여대 박가영 교수는 “천성진성에서 출토된 갑옷유물은 조선후기에 해당하는 17세기 또는 19세기 갑옷으로 추정된다”고 의견을 밝혔다.

 

부산대 윤용출 명예교수도 “두정과 갑찰의 형태와 크기를 비교해 볼 때, 17세기 중반 무렵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무엇보다 17세기 이완 장군의 갑주, 18세기 여반 장군의 갑주, 19세기 융원필비의 피갑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갑주 계보를 밝히는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는 유물”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갑옷은 찰갑에서 두정갑으로 바뀌는데, 천성진성 두정갑은 찰갑에서 두정갑으로 바뀌는 변화의 흐름, 조선후기 갑옷의 새로운 추세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유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매몰토상에서 수습돼 명확한 시기 규명을 위해서는 세밀한 분석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부산박물관 김은영 문화재조사팀장은 “동래읍성 해자에서 출토된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찰갑과 조선후기에 주류를 이루게 되는 두정갑의 양대 유물을 부산에서 발굴하고 소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며 “향후 부산이 갑옷 연구의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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