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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강원 나무 기행]화려하게 피고 진 불교국가…고려의 역사 1천년 품어

원주 법천사지 느티나무

 

지광국사탑 110년만에 고향 원주로 귀환
고목 사찰의 역사 온몸으로 기록 터 지켜
오랜 세월 흘러 몸통 한가운데 공간 생겨


#고려시대 번성한 법천사

'權不十年 花無十日紅(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다. '십 년 가는 권력 없고 열흘 붉은 꽃 없다'는 말로 부귀영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함을 표현하고 있다. 원주 법천사는 1,000년 전 권력을 뒤로한 채 텅 빈 벌판에 터만 남은 사찰이다. 거돈사지, 흥법사지가 지근거리에 있어 남한강 줄기를 따라 사찰들이 줄지어 선 강사(江寺) 형태를 이룬 불교유적이다.

사적 제466호로 지정된 법천사지는 고려 중기의 대표적 법상종 사찰로 알려져 있다. 사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 경순왕 2년(928년)이며, 고려시대 무신정권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 사찰로 문벌귀족의 후원을 받아 번성한 것으로 보인다. 10~12세기까지 유명한 승려가 이곳에서 법문을 깨우칠 정도로 이름난 사찰로 명문을 이어 갔다. 조선시대에는 유방선이라는 학자가 머물며 한명회, 서거정, 권람 등의 제자를 가르쳤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 이후 허균이 남긴 글에서는 이 사찰이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고려는 불교국가로 스님은 모두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였다. 지금 태국, 라오스 등 불교국가의 모습을 생각하면 고려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관성에 젖으면 감각기관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하나둘 쌓인 적폐는 새로운 사회를 잉태했고 이런 적폐 청산을 기치로 세운 나라가 조선이다.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국가 의제에 따라 선비 계급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구심점이 됐으며 스님은 천민이 돼 사회 밑바닥 계층으로 전락했다.

#지광국사탑비의 위용

강원지역의 주요 성씨인 원주 원씨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왔다. 원주에서 984년에 태어난 원해린은 16세(999년) 되던 해 스님이 됐다. 법명은 지광(984~1067년)이며 꾸준한 수행으로 당시 최고의 승려 지위인 국사, 승통, 왕사 등의 칭호를 받았던 큰스님이다. 절대 권력인 왕이란 호칭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묘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이 등에 임금 왕(王) 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걸 보면 당시 국사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를 통해 지광국사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비의 뒷면에는 1,370명의 제자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또한 비를 이고 있는 거북이는 그냥 용처럼 보일 정도로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거북이 등에는 수많은 왕자가 각인돼 위세를 떨치고 있다. 왕정국가에서 왕임을 스스로 드러낸다는 것은 반역을 의미하거나 진짜 왕이거나이다. 그만큼 왕권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꽃잎과 구름속의 용이 조각된 왕관 모양의 머릿돌과 비 몸돌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의 연꽃은 걸작으로 손꼽힌다. 구름, 용 문양 등 당시 최고의 조각가가 솜씨를 발휘한 작품으로 국보 제59호로 지정돼 있다.

묘비 상단에는 여러 신령스러운 문양이 암각돼 있다. 주렁주렁 보석을 달고 있는 세계수, 해를 상징하는 삼족오, 달을 상징하는 월계수, 원앙, 국화 등이 보인다. 당시 최고의 장인이 남겨놓은 수작이다. 그림 안을 거닐며 작품들을 감상하니 마치 신선이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탑비 앞에 있었던 지광국사탑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 골동품상 모리에 의해 불법 반출됐다가 조선총독 데라우치의 반환명령에 의해 1912년 조선총독부로 돌아왔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전시, 명동성당 부근, 경회루 동편 등으로 9차례 이전을 하다 6·25전쟁 당시 파괴돼 1만2,000개 조각으로 대파, 시멘트로 복원됐다. 2005년 경복궁 내 고궁박물관에 있다가 2016년 보존처리를 위해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전해 있다.

탑은 1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고향으로 되돌아온다. 고귀한 스님의 영혼이 담긴 탑과 탑비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1,000년의 동거를 다시 시작한다. 사찰 부지 가운데 느티나무가 서 있다. 둘레는 8m30㎝가량이며 수고는 10~12㎝ 정도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나이가 먹은 나무들은 대부분 속을 비운다. 일설에는 대부분의 생물은 배설물을 몸 밖으로 버리지만 나무는 몸 안쪽으로 버려 나무 가운데를 비우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텅 빈 나무 안은 성인 두 사람이 앉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며 비바람에도 나무를 버티게 하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 이 나무는 원주시 보호수에서 제외돼 있다. 사찰의 역사를 온몸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 나무는 옆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거돈사지의 느티나무와 비교하더라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거돈사지를 지키는 느티나무가 1,000년이라고 적고 있다. 이 나무에서 그보다도 더 많은 세월의 내공이 느껴진다.

글·사진=김남덕사진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