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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목포가 낳은 작가 천승세 ‘별’이 되다

81세로 타계…대표작 ‘황구의 비명’ ‘만선’ ‘낙월도’ 등 발표
근현대 최초여성작가 박화성 아들…민족문제 토속적 세계 천착

 

 

민족과 민중문제에 천착했던 목포가 낳은 소설가이자 극작가 천승세 씨가 지난 27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하동(河童) 천승세는 한국적 정한을 남도의 정서로 그려냈던 ‘한국문단의 가장 유니크한 작가’로 일컫는다. 한국 근현대 최초 여성 작가인 소영(素影) 박화성 소설가의 아들로, ‘황구의 비명’, ‘만선’과 같은 뛰어난 작품을 발표했다.

고인이 문단에 나올 당시 많은 이들은 그의 문재에 주목했다. 모친의 문학적 핏줄 이어받은 것을 증명하듯 “단 8시간 만에 탈고를 마친 소설 ‘점례와 소’가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에 당선된” 것은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다.
 

고인의 작품 중 일반에 가장 많이 알려진 소설 가운데 하나가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황구의 비명’이다. 1974년 8월 ‘한국문학’에 발표한 단편소설로, 양색시의 삶을 외세문제와 결부해 풀어낸 수작이다. 또한 황구와 수캐로 대변되는 관계를 착취와 피착취라는 상징적인 장치로 보여줌으로써 억압받는 민초들에게 적잖은 울림을 주었다.

 

 

1939년 목포에서 태어난 작가는 1961년 성균관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신태양 기자, 한국일보 기자, 독서신문 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대학 재학시절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점례와 소’가 당선돼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964년에는 경향신문 신춘문예 희곡 ‘물꼬’가 당선됐으며 이후 1965년 희곡 ‘만선’이 국립극장 현상공모에 당선돼 극작가로도 활동했다.
 

천승세의 이러한 이력은 ‘목포 극작가의 계보를 잇는 대표 희곡작가’로 꼽는 데 부족함이 없다. 즉 ‘김우진-차범석-천승세’로 이어지는 문향(文鄕) 목포를 대표하는 극작가라는 의미다.

그러나, 천승세는 희곡작가보다는 소설가로서 더 문명을 떨쳤다. 월남한 반공주의자 포대령의 몰락을 그린 ‘포대령’, 서정적 묘사와 입답이 압권인 ‘신궁’은 그의 문학세계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이다. 특히 핍박받는 약자들의 삶을 다룬 ‘혜자의 눈꽃’, ‘낙월도’ 등은 그의 시선이 늘 민초들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천승세는 시인으로도 활동했다. 1989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신인작품으로 시를 투고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몸굿’, ‘산당화’ 등의 시집을 펴낸 건은 일찍이 알려진 사실이다.

고인과 활발하게 교류했던 이승철 시인은 “천승세 선생님은 우리 문단에서 매우 드물게 시, 소설, 희곡 등 3개 문학 장르를 섭렵한 전천후적 작가이자, 오직 그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하고도 개성적인 문체로 한국문단을 살찌운 작가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천 선생님에게선 마치 야전을 진두지휘하는 사령관과 같은 풍모가 있었다. 젊은 날 그가 야전사령관이 되고자 육사를 지망했다는 사실이 짐짓 이해가 될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천 작가는 여느 작가들과 다른 개성적인 외모를 지녔다. 한번 만나면 강렬한 인상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승철 시인 또한 “천승세 작가의 그 코밑수염은 특유의 위엄을 느끼게 했고, 간혹 술김에 재미로 여기보란 듯이 자랑하는 솥뚜껑처럼 튀어나온 삼각권과 오른 팔뚝 위로 불룩 솟아오르던 알통은 나약한 문인들을 조금은 주눅 들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갖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천 작가는 1980년대 민족문학작가회의(지금의 한국작가회의)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른바 문학과 행동의 일치를 추구했던 행동주의자이기도 했다. 최근까지 한국작가회의 고문으로 추대될 정도로 그의 문학적 자장은 깊고 넓었다. 아울러 재기 발랄한 입담과 토속적·민중적 세계관, 민족적·민중적 관점은 여느 작가들과는 결이 다른 작품세계를 선사한다. 한국연극영화예술상, 만해문학상, 성옥문학 대상, 자유문학상 본상 등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심성이 늘 약동하고 있었다. 그의 아호 하동(河童)에는 “여름날 깨 할딱 벗고 천진스레 물장구치는 어린아이의 몸짓”이라는 의미가 투영돼 있다. 상남자 같은 다소 거칠어 보이는 외양 이면에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와 같은 예술적 동심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한때 천 작가는 목포 외에도 김포, 제주도, 서울 등지에서 생활했다. 그럼에도 그의 눈빛에선 목포의 먼 바다를 응시하는 듯한 깊이와 쓸쓸함이 배어나왔다는 게 문단 후배들의 전언이다. 한국문단에서 유니크한 존재이자 목포가 낳은 위대한 작가, 그는 이제 ‘별’이 되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