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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리뷰] 강력한 왕권을 보여주고 싶었던 무왕

국립익산박물관 ‘녹색 유약, 녹유’ 특별전시
익산 미륵사지서 1300여점 녹유기와 발견, 시기적 대규모 녹유기와 사용 미륵사지가 처음
웅진백제, 사비백제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유물
청동에 뒤를 이어 명예와 부, 권력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왕궁리유적서도 여럿 발견

익산의 미륵사지는 강력한 왕권을 꿈꿨던 무왕(재위 600~641)이 창건했다. 미륵사지에는 이러한 무왕의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 중 녹색기와가 수천점이 사용돼 눈길을 끈다.

국립익산박물관은 이러한 내용을 주제로 ‘녹색 유약, 녹유’ 특별전시를 3일부터 진행한다. 이번전시에서는 미륵사지 외에도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된 ‘녹유’를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전국 최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미륵사에서 발견된 녹유기와뿐아니라 국내 녹유 문화재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있다.

△미륵사지서 발견 된 대규모 ‘녹유’
 
녹유는 도토기 표면에 녹색과 청색을 내는 데에 사용하는 유약을 말한다. 반짝반짝 빛난다고 해 ‘유리’라고도 불렸던 녹유는 중국 한나라 때 만들어져 국내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생산됐다. 특히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녹유기와는 녹유 기와로 장식한 최초의 불교사원이다.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 웅진백제(475∼538)에서는 녹유는 볼 수 없었다. 다만 사비백제(538∼660)인 부여 등지에서 발견되는데 이렇게 대규모로 사용된 녹유 기와는 미륵사지가 사실상 유일하다.

실제 미륵사지에서는 1300여점이 넘는 녹유 서까래 막세가 발견됐다. 이같은 규모의 녹유 막새는 한 유적에서 출토된 가장 많은 양의 녹유기와로 불교사원 내 가장 중요한 건물인 금당지와 탑지 외에도 강당지, 승방지, 회랑지 등 거의 모든 건물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는 무왕이 미륵사지를 창건할 당시 미륵사에 모든 건물에 반짝이는 녹유기와로 장식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왜 무왕은 녹유를 선택했는가
 
녹유는 산화납, 산화구리, 산화철 등으로 이뤄졌다. 왜 무왕은 미륵사 창건에 이 녹유를 선택했을까.

먼저 녹유와 같이 청색을 띄는 청동은 오래 전부터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이전 삼국시대유물을 보면 이 녹유는 병, 바리, 벼루 등에 유약을 발라 지배계층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강력한 왕권을 꿈꿔왔던 무왕은 청동에 비해 더 빛이 나는 이 녹유기와를 미륵사와 왕궁리 유적에 사용하며,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왕권을 보여주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녹유가 시유된 기물은 백제와 신라 왕경인 부여 및 경주 또는 주요 거점지인 나주, 여수, 진해, 울산 등 매우 한정된 지역과 특정한 장소에서 나타난다. 주로 왕궁과 국가의 공공시설, 불교사원, 귀족의 저택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는 녹유 기물이 일반 백성이 아닌 왕실과 귀족 또는 관료에 의해 소비됐음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국립익산박물관 관계자는 “삼국시대 녹유를 시유한 기와로 건물을 장식할 수 있는 곳은 미륵사와 같은 불교사원이나 왕궁뿐”이라며 “청자의 등장으로 녹유 도기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푸른기와는 권위와 위엄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특별전을 통해 귀하고 고운 빛을 잃은 녹유 본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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