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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율곡에게 길을 묻다]국가 동력 위축되던 시기…개혁안 쏟아낸 시대 앞서간 천재

  • 등록 2020.07.02 19:44:45

 


 
대현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 대학자이자 경세가였던 그를 2020년 현재 다시 기억하려는 이유는 율곡 선생이 꿈꿨던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아직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지만 학문보다는 함께 사는 세상을 꿈꿨던 그의 가르침을 되새겨 보고 율곡 선생이 걸었던 그 길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기 위해 강원일보사는 율곡연구원과 함께 '율곡에게 길을 묻다'를 주제로 기획취재를 시작했다. 현시점에서 율곡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의 글을 통해 율곡 선생의 사상의 길을 되짚고 율곡 선생 관련 유적과 유물을 찾아보며 율곡이 가고자 했던 길을 찾아보고자 함이다. 율곡의 고향 강릉을 시작으로 부모를 따라 올라갔던 서울 및 파주의 삶과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방황하던 시절 금강산으로 가던 길, 다시 오죽헌으로 돌아와 마음을 다잡고 학문에 정진했던 길, 과거에 급제한 뒤 왕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상소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말했던 경장 길 등 율곡 선생의 삶 전반을 반추하며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볼 계획이다.

당시를 조선의 '중쇠기' 규정…국정 전반 혁신 필요성 강조
선조의 미온적 태도·믿었던 사림의 분열 속 뜻 이루지 못해
그가 제안했던 정책들 조선 후기 안정시키는 데 초석 역할


1584년 1월16일(음력) 율곡 이이가 별세했다. 1536년 12월26일(음력)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으니 햇수로는 49년이지만 만으로는 47년 하고도 스무날 남짓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의 삶으로서는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생애였다. 북인이 집권한 광해군 때 만들어진 '선조실록'의 같은 날 기사에는 “이조 판서 이이가 졸했다”는 짧은 졸기(卒記·사대부의 부고 기사) 한 줄만 달랑 실렸다.

반면에 율곡을 추앙하는 서인이 집권한 인조 대에 만들어진 '선조수정실록'에는 장문의 졸기가 적혀 있어 임종 당시의 정황을 전해준다. 이에 따르면, 율곡은 한 해 전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병이 생겨 이때에 이르러 악화됐다. 그런데 마침 함경도로 가던 순무사 서익(徐益)이 선조의 명으로 하루 전 율곡에게 조언을 듣기 위해 들렀다. 그러자 율곡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설령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라고 하며 아픈 몸을 일으켜 6가지 방책을 일러줬고, 그런 뒤 호흡이 가빠져 하루를 지탱하다 숨을 거뒀다. 이 기사가 말해 주듯이 율곡은 '워커홀릭'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맡은 일에 열정적이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건강도 돌보지 않을 정도로 그가 매진하고자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율곡은 자신의 시대를 '중쇠기(中衰期)'로 규정했다. 건국 초기의 융성기를 지나 국운이 하강 국면을 그리고 있는 시기라는 뜻이다. 율곡의 이런 진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율곡이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활동한 기간은 과거에 장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1564년(명종 19년)부터 급서한 1584년까지 만 20년 동안인데, 조선이 건국한 지 대략 180여년을 전후한 때에 해당한다.

이 기간 조선의 국세는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전반기는 성종 대까지로, 세조의 왕위찬탈 등 몇 가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신생 국가답게 제도적인 안정을 도모하며 통치체제를 완비해 가던 시기다. 그 정점에 1485년(성종 16년) 최종적으로 반포된 '경국대전'이 있다. 이에 비해 후반기는 연산군의 폭정과 연이은 사화로 국가 경영의 동력이 급격히 위축되던 때다. 조선사회는 모든 부문에서 '경국대전' 체제의 한계를 드러냈고, 이에 따라 국정 전반에 대한 혁신이 요구됐다. 이는 여러모로 6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87년' 체제가 '시대'를 담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작금의 상황과 비견된다.

율곡은 자신의 시대에 부과된 그런 시대사적 요구를 '경장(更張)'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해현경장(解弦更張)', 즉 느슨해진 거문고 줄을 풀어 다시 맨다는 의미로, 국정 전반에 혁신이 필요함을 나타낸 말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벼슬길에 나온 후 율곡은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안들을 쏟아냈다. 관료제도와 지방행정의 효율성 증대를 위해 감사(관찰사)의 임기를 늘리고 기준에 미달하는 행정조직을 병합할 것을 역설했으며, 폐해가 드러나고 있던 이조(吏曹) 낭관(官)의 후임추천권(낭천권) 폐지를 촉구했다.

경제·민생 분야에서는 공납제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국가에 바치는 공물을 쌀로 일괄 대체하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의 시행을 주장해 조선 최대의 민생개혁정책이라고 평가받는 대동법의 선하를 이뤘다. 또한 국방 강화를 위해 군역제도의 개혁과 상비군 양성, 전마(戰馬)와 군비의 비축, 서얼 철폐를 통한 군사력 증강 등의 실용적 정책을 제안했다.

뿐만 아니라 향교와 성균관, 서원의 운영규칙들을 정비하고 향약을 시행하는 등 장기적 관점에서 성리학적 공동체를 구현해 나가는 데 필요한 교화정책들을 입안했다.

그러면 이렇듯 시대를 내다봤던 율곡의 개혁정책은 성공을 거뒀을까? 불행히도 그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두 가지 원인이 가장 컸다. 개혁에 대한 임금 선조의 미온적인 태도가 하나이고, 율곡이 믿었던 사림의 분열이 다른 하나였다. 특히 두 번째 요인은 율곡에게 많은 상실감을 안겼다. 그는 개혁의 주력이어야 할 사림이 당파로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죽는 순간까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다가 자신의 예기치 않은 죽음까지 더해져 그의 개혁정책은 끝내 좌초하고 말았다.

하지만 율곡의 실패는 한시적인 것이었다. 그가 제안한 정책들은 임진왜란 이후 하나둘씩 정책화돼 조선 후기를 안정시키는 초석 역할을 했다. 일종의 상비군 제도인 훈련도감의 설치, 대동법과 균역법의 시행, 이조의 낭천권 폐지, 서얼 철폐, 향약 시행 등 그가 생전에 제시한 정책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차는 있었지만 조선 후기에 모두 순차적으로 시행됐다. 현실정치에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율곡의 시대진단과 방향 제시가 옳았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이쯤에 오면 원로 사학자 한영우가 “정도전을 알면 조선 전기를 알 수 있고, 율곡을 알면 조 선후기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한 말이 무슨 맥락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율곡은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였고, 탁월한 정치가였으며, 영혼이 있는 관료였다. 이 가운데 어느 한두 방면에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조선 선비들의 일반적인 생애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은 분명 대단한 성취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율곡을 다시금 역사에서 불러내는 까닭이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분석 그리고 그에 따른 구상과 실천의 훌륭한 사례를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율곡의 생각을 복기하는 이유가 온전히 여기에만 있지는 않다. 현실정치에서의 그의 실패 또한 의미 있는 반면교사다.

그렇게 시대의 흐름을 읽은 정책들이 그의 당대에서는 왜 실패했는가? 우리는 이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우리가 오늘 율곡을 호출하는 이유다.

박원재 율곡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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